안코나
| 안코나 Ancona | |||||
|---|---|---|---|---|---|
상단부터 시계 방향: 몰레 반비텔리아나에서 본 도시 전경, 스칼리나타 델 파세토와 11월 4일 광장 및 무명 용사 기념비, 로자 데이 메르칸티, 산 치리아코 대성당, 플레비시토 광장 (파파 광장), 트라야누스 개선문과 클레멘티노 개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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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 | |||||
| 국가 | |||||
| 지역 | 마르케주 | ||||
| 행정 구역 | 안코나도 | ||||
| 지리 | |||||
| 면적 | 124.84 km2 | ||||
| 해발 | 16 m | ||||
| 시간대 | CET (UTC+01:00) CEST (UTC+02:00) | ||||
| 인문 | |||||
| 인구 | 100,924명(2018년) | ||||
| 인구 밀도 | 810명/km2 | ||||
| 지역 부호 | |||||
| 우편번호 | 60100, 60121–60129, 60131 | ||||
| 지역번호 | 071 | ||||
| 웹사이트 | https://www.comune.ancona.gov.it/ankonline/ | ||||
안코나(이탈리아어: Ancona)는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주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안노나는 동명의 상위 행정구역 및 마르케주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북동쪽 280 km (170 mi) 거리에 있으며, 코네로산의 갑(岬) 양쪽 돌출부인 아스타뇨산(Monte Astagno)과 구아스코산(Monte Guasco)의 절벽 사이 아드리아해와 접하고 있다. 안코나 주변의 구릉 지형은 북쪽 지역의 평탄한 해안 지대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앜노나는 아드리아해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특히 특히 여객 교통의 중심지로, 마르케 지역의 주요 경제 및 인구 중심지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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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식민지
[편집]그리스인들의 식민지 건설 이전, 이 지역에는 피켄테스라는 별개의 부족 공동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안코나는 기원전 370년경 시라쿠사에서 넘어온 그리스 정착민들에 의해 도시 형태가 갖춰졌고, 그리스인들은 이곳에 안코나를 이름을 붙였는데 안코나는 활 또는 굽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ἀγκών (안콘)에서 비롯했으며 도시의 동쪽에 있던 항구가 활 모양을 한 북쪽 갑에 의해서만 보호를 받았었다. 그리스 상인들은 이곳에 티리언 퍼플 염료 공방을 세웠다.[1] 로마 시대에 이곳은 언어 유희로서 종려나무 가지를 팔로 쥔 모습을 담고 있으며, 뒷면에는 아프로디테의 두상이 새겨진 자체적 주화를 유지했고, 그리스어 사용도 이어나갔다.[2]
로마 시대의 무니키피움
[편집]언제 이곳이 고대 로마의 도시가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78년 일리리아 전쟁 당시 군항이 위치했었다.[3]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자 마자 이곳의 통제권을 차지했다. 안코나 항구는 달마티아와 인접해 있어 제정 시대에도 상당히 중요성을 띠었고, 트라야누스에 의해 확장이 이뤄지는데, 그는 건축가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로 하여금 북쪽 선창을 지으라 하였다. 항구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단일 아치 구조 형태로 된 대리석 개선문인 트라야누스 아치가 있으며,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서기 115년에 그를 기념하며 저부조가 없는 형태로 세운 것이었다.[2]
비잔티움 시대
[편집]안코나는 서기 3세기와 5세기 사이에 고트족과 랑고바르드족들의 연달아 공격을 받았지만, 안코나의 저력과 중요성을 회복해냈다. 7세기와 8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하에 있는 라벤나 총독부의 펜타폴리스 중 하나였다.[2][4] 840년, 사라센 약탈자들이 공격을 하여 도시를 불태웠다.[5] 샤를마뉴의 이탈리아 북부 정복 이후, 안코나 변경의 수도가 되었고, 오늘날 안코나도의 이름이 이때부터 비롯했다.
안코나 해상 공화국
[편집]1000년 이후, 안코나는 점차 독립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주요 해상 공화국[6] (가에타, 라구사)와 함께, 이탈리아 해군기에는 나타나지 않음)으로 바뀌었으며, 인접한 세력인 베네치아와 자주 충돌했다. 과두 공화정이던 안코나는 도시를 이루는 세 개 테르치에레 (S. Pietro, Porto, Capodimonte)에서 선출한 여섯 원로들에 의해 운영됐다. 자체 주화인 아곤타노를 발행했고, Statuti del mare e del Terzenale와 Statuti della Dogana라는 법률을 갖고 있었다. 안코나는 보통 라구사 공화국 및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 관계이었다.
1137년, 1167년, 117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병력들을 격퇴시킬 만큼 강성했다. 안코나의 함선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고, 항해사들에는 안코나의 키리아코스가 있었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혼란시킨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분쟁 기간, 안코나는 교황 측 편에 섰다 (구엘프와 기벨린).[7]

다른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과 달리, 안코나는 시뇨리아 체제가 된 적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1348년에 이곳을 점령한 말라테스타 가문의 지배 시기로, 그는 흑사병과 화재를 이용했으며 도시의 여러 건물들을 파괴했다. 말라테스타 가문은 1383년에 철수하였다. 1532년, 안코나는 최종적으로 자치를 상실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 시기 교황령의 일부가 되었다. 새로운 교황령 행정부의 상징은 커다란 성채이었다.
교황령
[편집]교황 비오 4세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 혐의로 안코나의 콘베르소 상인들을 화형시키라는 명을 내렸다.[8] 이후, 안코나는 로마 및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과 더불어 교황 비오 5세의 1569년 추방 명령 이후에도 잔류가 허용된 교황령 도시 세 개 중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1555년에 설치된 안코나의 게토 지역에 거주했다.
1733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선창을 확장시켰고, 트라야누스 아치를 모방한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또한 항구의 남쪽 끝에 라차레토를 세웠는데, 루이지 반비텔리가 건축 책임자이었다. 남쪽 선창은 1880년에 세워졌으며, 안코나는 고지대의 요새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1797년 이래로 프랑스가 차지했으며, 중요 요새로서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1832년 프랑스의 안코나 원정군이 도시를 점령하여 1838년까지 남아있다가 이들과 볼로냐의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하기로 상호 합의했다.[9]
안코나의 그리스 공동체
[편집]안코나는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온 교역상들의 중요한 행선지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외국 상인들 공동체 중 가장 큰 규모를 이뤘다. 이들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옛 비잔티움 제국이나 베네치아 영토에서 온 망명자들이었다. 최초의 그리스 공동체는 16세기 초 안코나에서 성립됐다.
현대사
[편집]안코나는 루이 쥐쇼 드 라모리시에르가 카스텔피다르도에서 패한 지 11일 만에 일어난 공방전 끝에 1960년 9월 29일에 그가 항복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2]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에 가담했다. 1915년,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단이 막대한 포격을 가하여 안코나의 모든 설비에 막대한 피해를 가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사망케하였다.[10] 안코나는 대전쟁 기간 아드리아해 지역 이탈리아의 최핵심 항구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안코나는 영국군 소속으로 복무하던 자유 폴란드군의 제2 폴란드 군단에 의해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폴란드군은 1944년 6월 16일에 도시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한달 뒤인 1944년 7월 18일에 이를 해냈으며 이때의 행방은 안코나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때 공격은 북이탈리아로 진격을 위한 보급로를 줄이기 위해 고딕 라인과 가까운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벌인 연합국의 작전의 일환이었다.[11]
유대인 역사
[편집]유대인들은 기록물에 의하면 서기 967년에 안코나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존재하기도 한다.[12][13] 1270년 당시, 안코나에 거주하던 유대인인 안코나의 야코브가 마르코 폴로보다 4년 앞서 중국을 여행했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The City of Lights"이라는 책에서 그가 느낀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1300년부터, 안코나의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성장하였으며, 이는 대부분 도시가 가진 중요성과 레반트 지역과의 교역 중심지인 데서 기인했다.[14] 같은 해, 유대인 시인 임마누엘 로마노는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징수되던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키려 노력하였다. 200년 뒤, 독일, 스페인, 시칠리아, 포르투갈 등지의 유대인들이 안코나로 이주해왔는데, 고향땅의 박해 및 안코나를 무역 중심지로 만들어준, 교역 및 은행업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중요성으로 인해 안코나 유대인들에 대한 친 유대인 정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555년에, 교황 바오로 4세는 1555년 칙령의 일환으로 안코나의 비밀 유대교인 공동체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개종을 했으나, 나머지는 거부를 하면서 교수형을 당하고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13] 이렇게 되자, 유대인 상인들은 일시적으로 안코나 측에 보이콧 행동을 벌였다. 이 보이콧은 도나 그라차 멘데스 나시가 주도했다.
인구
[편집]| 연도 | 인구 | ±% |
|---|---|---|
| 1174 | 11,000 | — |
| 1565 | 18,435 | +67.6% |
| 1582 | 27,770 | +50.6% |
| 1656 | 17,033 | −38.7% |
| 1701 | 16,212 | −4.8% |
| 1708 | 16,194 | −0.1% |
| 1769 | 23,028 | +42.2% |
| 1809 | 31,231 | +35.6% |
| 1816 | 32,636 | +4.5% |
| 1828 | 36,816 | +12.8% |
| 1844 | 43,217 | +17.4% |
| 1846 | 43,953 | +1.7% |
| 1853 | 44,833 | +2.0% |
| 1861 | 47,230 | +5.3% |
| 1871 | 45,681 | −3.3% |
| 1881 | 48,888 | +7.0% |
| 1901 | 58,602 | +19.9% |
| 1911 | 65,388 | +11.6% |
| 1921 | 68,521 | +4.8% |
| 1931 | 75,372 | +10.0% |
| 1936 | 78,639 | +4.3% |
| 1951 | 85,763 | +9.1% |
| 1961 | 100,485 | +17.2% |
| 1971 | 109,789 | +9.3% |
| 1981 | 106,432 | −3.1% |
| 1991 | 101,285 | −4.8% |
| 2001 | 100,507 | −0.8% |
| 2010 | 102,997 | +2.5% |
| Source: P. Burattini. Stradario – Guida della città di Ancona (Ancona, 1951) and ISTAT | ||
기후
[편집]| Ancona (1971–2000)의 기후 | |||||||||||||
|---|---|---|---|---|---|---|---|---|---|---|---|---|---|
|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일평균 최고 기온 °C (°F) | 9.2 (48.6) |
10.2 (50.4) |
13.6 (56.5) |
16.9 (62.4) |
21.7 (71.1) |
25.6 (78.1) |
28.2 (82.8) |
28.1 (82.6) |
24.5 (76.1) |
19.4 (66.9) |
13.9 (57.0) |
10.4 (50.7) |
18.5 (65.3) |
| 일일 평균 기온 °C (°F) | 5.3 (41.5) |
5.9 (42.6) |
8.6 (47.5) |
11.6 (52.9) |
16.3 (61.3) |
20.1 (68.2) |
22.6 (72.7) |
22.7 (72.9) |
19.3 (66.7) |
14.7 (58.5) |
9.8 (49.6) |
6.5 (43.7) |
13.6 (56.5) |
| 일평균 최저 기온 °C (°F) | 1.4 (34.5) |
1.6 (34.9) |
3.6 (38.5) |
6.4 (43.5) |
10.9 (51.6) |
14.5 (58.1) |
16.9 (62.4) |
17.2 (63.0) |
14.0 (57.2) |
10.0 (50.0) |
5.7 (42.3) |
2.6 (36.7) |
8.7 (47.7) |
| 평균 강수량 mm (인치) | 43.8 (1.72) |
49.3 (1.94) |
56.8 (2.24) |
58.8 (2.31) |
54.0 (2.13) |
60.4 (2.38) |
47.1 (1.85) |
76.4 (3.01) |
72.6 (2.86) |
75.9 (2.99) |
86.0 (3.39) |
58.1 (2.29) |
739.2 (29.10) |
| 출처: MeteoAM[15] | |||||||||||||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Silius Italicus, VIII. 438
- ↑ 가 나 다 라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 리비우스 xli. i
- ↑ 나머지 도시 네 개는 파노, 페사로, 세니갈리아, 리미니이었다
- ↑ The Italian Cities and the Arabs before 1095, Hilmar C. Krueger, A History of the Crusades: The First Hundred Years, Vol. I, ed. Kenneth Meyer Setton, Marshall W. Baldw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55), p. 47.
- ↑ The International Geographic Encyclopedia and Atlas, Ancona (p. 27), Springer, 1979. ISBN 9781349050024.
- ↑ “Ancona-Presentazione di Storia” (영어). 《Genially》. 2024년 11월 29일에 확인함.
- ↑ Ray, Jonathan Stewart (2013). 《After expulsion: 1492 and the making of Sephardic Jewry》.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70, 73쪽. ISBN 978-0-8147-2911-3.
- ↑ O'Malley, John W. & Levillain, Philippe (ed.) The Papacy: An Encyclopedia · Volume 1. Routledge 2002 p.672
- ↑ Hore, Peter, The Ironclads, London, Southwater Publishing, 2006. ISBN 978-1-84476-299-6.
- ↑ Jerzy Bordziłowski (ed. ), Mała encyklopedia wojskowa. Tom 1 (폴란드어), Warsaw, Wydawnictwo Ministerstwa Obrony Narodowej, 1967.
- ↑ “The Jewish Community of Ancona”. The Museum of the Jewish People at Beit Hatfutsot. 2018년 6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2월 3일에 확인함.
- ↑ 가 나 “Ghetto of Ancona” (미국 영어). 《Visit Jewish Italy》. 2024년 9월 26일에 확인함.
- ↑ 인용 오류:
<ref>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Matas v7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 ↑ “Falconara” (PDF). Italian Air Force National Meteorological Service. 2014년 3월 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안코나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안코나 - 공식 웹사이트
| 이 글은 이탈리아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