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희곡)
파수꾼은 1973년 문예지 《현대문학》에 발표되고 1974년 극단 에저또에 의해 초연된 이강백의 단막 희곡이다.[1] 이 작품은 우화적인 장치를 통해 체제 유지를 위해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지배 집단의 위선적인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유신 체제 하에서 안보 논리를 앞세워 독재 권력을 정당화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풍자한 한국 현대 희곡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2] 대한민국의 중등 교육 과정 국어 및 문학 교과서에 자주 수록되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개요
[편집]작가는 이 작품에서 구체적인 시대나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망루가 있는 황야라는 추상적인 배경을 설정하여 이야기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작품의 핵심 갈등은 실재하지 않는 '이리 떼'라는 가상의 공포와 이를 이용하는 권력자,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으나 결국 현실의 논리에 굴복하는 개인 사이에서 발생한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순수한 열정이 노련한 권력자의 회유와 협박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수호하는 일의 어려움과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3]
줄거리
[편집]작품은 황야에 높이 솟은 망루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이곳에는 늙은 파수꾼 '가'와 '나', 그리고 이제 막 파수꾼 일을 시작한 소년 파수꾼 '다'가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이리 떼의 습격을 감시하며, 이리 떼가 나타났다는 신호가 오면 양철북을 두드려 마을에 알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파수꾼 '가'와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지만 정작 이리 떼를 직접 본 적은 없으며, 단지 관습적으로 북을 두드려왔을 뿐이다.
어느 날 신참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서 보초를 서던 중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리 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흰 구름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소년은 이 사실을 촌장에게 알리는 편지를 촌장실로 보내고, 촌장이 와서 진실을 밝혀주기를 고대한다.
편지를 받은 촌장은 망루로 찾아온다. 촌장은 소년과 단둘이 대면한 자리에서 놀랍게도 자신 역시 이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촌장은 소년에게 냉혹한 현실의 논리를 설파한다. 그는 이리 떼라는 가상의 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고 질서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리가 없다는 진실이 밝혀지면, 그동안 공포에 떨며 헛된 경비를 부담했던 마을 사람들이 분노하여 파수꾼들을 죽일 것이라며 소년을 겁박하고 회유한다.
촌장은 소년에게 "오늘 하루만 내 말을 따라주면 내일 진실을 공표하겠다"고 제안한다. 잠시 후 촌장의 선동을 듣고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망루 아래로 몰려오자, 겁에 질린 소년은 결국 촌장과의 약속대로 "이리 떼가 몰려온다!"고 거짓으로 외치며 양철북을 두드린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공포에 질려 물러가고 촌장은 만족스러운 듯 소년을 칭찬하며 떠난다. 결국 소년은 진실을 말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자신이 경멸했던 기존의 파수꾼들과 다를 바 없는 거짓의 하수인이 되어 망루 위에서 허무하게 북을 두드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1]
등장인물
[편집]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고유한 이름 대신 역할이나 기호로 호명됨으로써 개별적인 인격체라기보다는 특정 계층이나 인간상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촌장은 마을의 지배자이자 교활한 권력자이다. 그는 이리 떼가 허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한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억압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위선적인 인물이다. 소년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논리는 권력이 어떻게 부조리를 정당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수꾼 다 (소년)는 맑은 눈을 가진 순수한 인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을 직시하는 존재다. 그는 용기 있게 진실을 알리려 시도하지만, 노련한 촌장의 정치적 수사에 휘말려 결국 자신의 신념을 꺾고 만다. 이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마는 나약한 지식인 혹은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을 상징한다.
파수꾼 가와 파수꾼 나는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파수꾼 가'는 늙고 무기력하여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따르는 인물이며, '파수꾼 나'는 촌장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이들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한 채 지배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한 우매한 대중 혹은 권력의 하수인들을 대변한다.
작품 분석
[편집]우화적 기법과 상징성
[편집]《파수꾼》은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우화(Allegory)라는 형식을 빌려 검열이 심했던 당시의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었다. 작품 속 주요 소재들은 각각 뚜렷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망루'는 진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 기관이나 제도를 상징하며, '이리 떼'는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조작된 가상의 공포 혹은 외부의 위협을 의미한다. 반면 '흰 구름'은 억압된 진실과 자유, 평화를 상징한다. '양철북'은 공포감을 조성하고 대중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 선전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2]
주제 의식
[편집]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진실과 거짓의 대립' 그리고 '권력의 속성'이다. 작가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통치 방식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폭로한다. 또한 촌장의 논리에 굴복하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거짓된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인지, 그리고 진실이 패배하는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묻는다. 소년이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결말은 악순환이 반복될 것임을 암시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과 반성을 촉구한다.
문학사적 의의 및 수용
[편집]《파수꾼》은 1970년대 한국 문학계에서 유행했던 우화극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유신 독재 정권은 안보 위기를 이유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했는데, 이 작품은 '이리 떼'라는 소재를 통해 그러한 안보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꼬집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정보의 통제와 가짜 뉴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는 개인의 태도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 고전으로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연극계에서는 꾸준히 재공연되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는 희곡의 본질과 사회적 기능을 가르치는 중요한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