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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구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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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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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가능하고 신뢰적인 출처를 달아주세요. 그렇지 않는다면 삭제 토론에 회부하겠습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19일 (수) 17:32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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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구존유에서 1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봇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주 묻는 질문을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8년 11월 13일 (화) 06:56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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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구존유에서 1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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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9년 8월 17일 (토) 14:31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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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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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20년 6월 22일 (월) 21:16 (KST)답변

장기인증보호 편집 요청 (2025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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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상삼한삼중대광'은 '삼한벽상공신'과 다른 개념으로, 고려 중후기에야 도입된 품계입니다.

비록 '삼한공신'과 '삼중대광'을 동시에 하사받는 경우는 고려 초부터 종종 있어왔지만[1], 고려시대 문헌에서 '벽상삼한삼중대광'이라는 품계를 받은 것으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기홍수(奇洪壽, 1148~1209)[2]최충헌(崔忠獻, 1149~1219)[3]입니다.

이후 13세기 말부터 기록상 '벽상삼한삼중대광'을 하사받은 인물들이 대거 나타나게 됩니다. 그 예로는 정가신(鄭可臣, 1224~1298)[4], 김방경(金方慶, 1212~1300)[5], 염승익(廉承益, ?~1302)[6], 정인경(鄭仁卿, 1237~1305)[7], 안향(安珦, 1243~1306)[8], 홍자번(洪子藩, 1237~1306)[9], 조인규(趙仁規, 1237~1308)[10], 권단(權㫜, 1228~1311)[11], 조서(趙瑞, ?~1313)[12], 송분(宋玢, 1239~1318)[13], 민지(閔漬, 1248~1326)[14], 김태현(金台鉉, 1261~1330)[15], 최원직(崔元直, ?~1331)[16], 김심(金深, 1262~1338)[17], 한악(韓渥, 1274~1342)[18], 김륜(金倫, 1277~1348)[19], 김영돈(金永暾, 1285~1348)[20], 권한공(權漢功, ?~1349)[21], 홍빈(洪彬, 1288~1353)[22], 이암(李嵓, 1297~1364)[23], 이공수(李公遂, 1308~1366)[24], 이제현(李齊賢, 1288~1367)[25], 신돈(辛旽, ?~1371)[26], 염제신(廉悌臣, 1304~1382)[27], 윤지표(尹之彪, 1310~1382)[28], 정몽주(鄭夢周, 1338~1392)[29], 이색(李穡, 1328~1396)[30], 심덕부(沈德符, 1328~1401)[31]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벽상삼한삼중대광'은 고려 중기에 도입되어 후기에 활발히 사용된 품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려사 직관지에서 해당 품계가 충선왕(1308년) 및 공민왕(1362년)의 문산계 개편 기사에만 언급된다는 점으로도 뒷받침됩니다. [32][33]

따라서 '구존유' 문서에서 "더불어 고려의 삼한벽상공신(918년 경)인 구존유와 1224년(고려 고종 11년)에 망명해 온 주잠이 어떻게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300년의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위 사실에 의거하면 구존유 또한 13~14세기에 활동한 인물일 가능성이 고려 건국 당시의 인물일 가능성보다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능성 구씨의 중국 도래설에 대한 반론은 나머지 문단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Planet604 (토론) 2025년 6월 26일 (목) 23:28 (KST)답변

아울러 능성 구씨 족보상 구존유의 4대손이라 전해지는 구영검(具榮儉)은 공민왕 대에 활동하다가 1356년에 처형된 인물이며[34][35], 그 손자인 6대손 구홍(具鴻) 역시 우왕 재위기인 1383년[36]~1385년[37]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됩니다. 만일 구존유가 현 문서의 서술대로 고려 건국 당시에 생존해 있었다면 4대 만에 4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Planet604 (토론) 2025년 6월 26일 (목) 23:52 (KST)답변
참고로 저는 문서 역사에서 어떤 분이 언급하신 악성 차단회피자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 둡니다. 제가 쓰는 계정은 이것뿐입니다. 이전부터 편집 요약을 통해 문제의 서술을 삭제한 사유를 꾸준히 밝혀 왔음에도, 타 사용자의 기여분과 혼동되어 여러 차례 되돌려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혹여나 단순 실수가 아니라 정말 구존유가 918년을 전후로 활동했다고 생각하여 해당 서술을 복구하신 것이라면 토론을 통해 의견을 개진해주시기 바랍니다. Planet604 (토론) 2025년 6월 27일 (금) 00:57 (KST)답변
확인했으며 위의 "더불어~논란이 많다" 문장은 제거했음을 알립니다. 또한 관련해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한 경우 이 밑에 의견을 제시해주거나 저를 핑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Sqncjs (토론) 2025년 6월 27일 (금) 01:12 (KST)답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외에도 문서의 프로필 표에 기재된 "군주: 왕건 초대 황제" 항목을 삭제하고, "삼한벽상공신"이라 적힌 부분을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수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Planet604 (토론) 2025년 6월 27일 (금) 17:18 (KST)답변
해당 요청도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정을 만드신 기간으로 미루어보아) 500회의 편집을 만족하시면 해당 문서를 편집할 수 있는 장기인증권한을 얻게 된다는 것도 알려드립니다. 지속적인 기여 및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Sqncjs (토론) 2025년 6월 27일 (금) 22:11 (KST)답변
또한 해당 문서에 집착하는 그 차단회피자가 어느정도 침입이 잦아들고 하면 당연히 이 문서의 보호 수준을 내려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도 해당 차단회피자가 매일매일 위키백과에 집착을 하고 있는 덕에 해당 문서의 보호 수준을 현재와 같이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Sqncjs (토론) 2025년 6월 27일 (금) 22:37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