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분제도
조선의 신분제도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1] 실제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다.[2] 조선의 신분제는 세부 신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없고 각자가 맡은 직업인 직역이 고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란 점에서 이웃한 일본의 신분제와 달랐고, 실제로 별다른 신분의 구분이 없던 중국의 제도와도 달랐다. 조선의 신분제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3]
양반
[편집]양반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총칭하던 말로서, 이들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지 않고 유학만을 공부하여 과거를 거쳐 아무 제한 없이 고급 관직으로도 승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관료가 되면 토지와 녹봉(祿俸) 등을 국가에서 받게 되므로 지주계급(地主階級)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양반 가운데서 조선의 건국 이래 속출된 각종의 공신(功臣)들과 고급 관료들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의 명목으로 지급된 광대한 토지를 점점 세습·사유함으로써 대지주가 되었으며, 이런 경제적인 기반을 토대로 삼아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문벌을 이룬 양반도 생기게 되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문관은 무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일반적인 요직은 물론, 군사 요직까지도 문관이 장관이 되면, 무관을 그 아래 두었던 일이 많았다. 양반의 서얼(庶孼) 출신자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던 반면에, 무과에는 천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응시할 자격을 준 결과 적서(嫡庶)의 차별과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얕잡아 보는 사회적인 인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편 양반 신분의 세습에 따른 그들의 수적(數的) 팽창은 한정된 국가 정치기구에의 참여를 둘러싸고서 서로 이권과 이념을 달리하는 파벌을 짓게 하여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란 피비린내 나는 대립 항쟁을 일으키게도 하였다.
중인
[편집]중인은 외국어(外國語)[4]·의학(醫學)·천문학(天文學)·법률학 등 특수 기술을 배워 세습하였다. 중인과 양반의 서얼 출신자를 합하여 중서(中庶)라고 해서 양반 이외의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었지만, 법으로써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제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낮은 관직에 그치고 말았다. 중기 이후에 이들의 한품서용(限品敍用)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려는 기운이 싹트기도 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서얼들은 출세의 길이 막힌 것에 불만을 품고 서로 무리를 지어 반역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기도 하여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들보다 하위(下位)의 신분층으로 이서(吏胥)·역리(驛吏)·군교(軍校) 등이 있었는데 말단(末端)의 행정·경찰사무를 담당하여 직접 평민들을 지배하는 실권을 쥐고 있어 사회적으로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상민
[편집]상민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租稅)·공부(貢賦)·군역(軍役) 등 각종의 의무를 부담한데다가 지방관이나 향리 등의 착취대상이 되어 그 생활은 일반적으로 몹시 비참하였다. 이렇게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서로 단결하여 살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농촌 공동체를 만들게 하였으며, 상호부조를 목적한 여러 가지 계(契)가 조직되었다.
한편 말기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심해지던 관리들의 수탈에 대한 반항으로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니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의 민란, 동학혁명(東學革命) 등의 주체는 농민이었다.
천민
[편집]천민은 양반이나 중인이 거느리던 백성으로, 노비(奴婢)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상속 등의 대상이 되었다. 더군다나 사람취급도 못받아 동물취급을 받았다. 노비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둘로 대별(大別)될 수 있었지만 이들 가운데에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이 밖에 창기(娼妓)·무당·광대 등도 천인에 속하였으며, 불교의 몰락과 함께 승려도 천인의 대우를 받았다. 유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승려들은 부모와 임금을 버리고 출가하여 윤리를 멸시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5]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대를 받은 신분층은 백정(白丁)으로서 이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으며 특수부락(特殊部落)을 이루어 일반인과도 격리된 가운데서 도살(屠殺)·유기장(柳器匠) 등의 작업을 세습하며 살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신분 계급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지배체제는 형성 유지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다소 변천이 생겨 평민이나 천인으로서도 전공(戰功) 또는 납속(納贖)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상(堂上)·당하(堂下)의 위계(位階)나 직명(職名)을 얻는 경우도 많았으나, 특전이란 군역을 면제받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일신(一身)에만 한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이와 같이 엄격한 신분체제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이후 신분 계급의 타파가 제도화됨으로써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갔다.
신분제의 동요
[편집]조선 후기의 산업 발달은 전통적인 신분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서 신분제가 동요하게 되었다. 양인과 노비의 엄격한 차별과 세습성을 특징으로 하는 양천제가 무너지고, 양반(사족)과 상민(평민과 노비)이 대칭되는 새로운 계급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른바 반상(班常)의 구별이다. 그러나 양천제가 법에 따라 규제되는 신분제라면, 반상 구조는 사회 관행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구속력이 약하고 서로간의 상하 이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따라서 반상 구조는 신분사회에서 근대적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라 할 수 있다.
개설
[편집]신분제의 붕괴는 무엇보다도 지주제의 발전에 따라 그 단서가 열렸다. 16세기 이후로는 병작제가 보편화되면서 양인 중에서 지주의 위치에 있던 부류가 양반(사족)으로 상승하고, 작인의 처지에 있던 부류는 양인이건 노비이건 상한(常漢)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의 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는 더욱 급속하게 무너졌다.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국가는 군역 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납속)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속오군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했다. 또한 노비 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인으로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1669년(현종 10년)에 시작되어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다가 1731년(영조 7년)에 정착되었다. 당시에는 양인과 노비 사이의 결혼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로 양인이 되는 노비가 적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도 도망자가 속출하여 국가에서는 신공(身貢)과 입역(入役)을 완화해 주기도 하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자 마침내 1801년(순조 1년)에 일부 공노비를 제외한 66,000여 명의 공노비(내사노비)를 평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나머지 공노비는 1894년의 갑오경장 때 해방되었는데, 이때 사노비도 세습제가 폐지되어 한국 노비제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양반 계급의 동요
[편집]한편,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그에 대신하여 나타난 반상(班常) 구조는 양반의 계급적 구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우선 양반의 개념이 조선 초기와 달라졌다. 원래 양반이란 문무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가리켰으나, 조선 후기의 양반은 뚜렷한 법제적·객관적 기준이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양반은 학문과 벼슬의 유무를 기준으로 척도를 삼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명성이 높은 학자나 서원의 유생, 생원, 진사, 그리고 벼슬아치의 친족들이 양반을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족보를 만들어 족단 전체가 양반가문으로 행세하고, 상한(常漢)과는 통혼하지 않았다. 또 이들은 청금록(靑衿錄) 혹은 향안(鄕案)이라는 양반 명단을 만들어 향약 등 향촌 자치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국가는 기준이 모호한 양반을 일률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과거응시자격, 특히 고급문관이 되는 생진과(生進科)와 문과(文科)의 경우에는 4조(증조·조·부·외조) 중에 현관(顯官, 실직 관리)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게 하였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경우에는 ‘유학(幼學)’으로 기록된 사람에 한하였다. 이러한 신원의 파악은 국가가 작성한 호적에 따라 확인되었으므로, 상한(常漢) 중에서도 벼슬을 하고 싶거나 군역을 면제받고자 하는 사람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호적을 바꾸고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조상의 신분을 위조하는 것을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하고, 자신의 직업을 ‘유학(幼學)’이라고 속이는 사람을 ‘모칭유학’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상민(常民) 중에서 신분을 속여 양반 행세를 하는 가짜 양반이 시대가 흘러갈수록 많아져서 19세기 들어가면 전체 주민의 과반수가 양반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양반 인구가 급증한 것은 그만큼 계급 상승이 활발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핵심에 접근하는 길은 모든 양반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실제 관직을 주는 경우에는 가문의 차별과 지방의 차별이 있었다. 이른바 청요직이라 불리는 승문원·홍문관 등에는 한양 양반(경화사족)이 임용되고, 서북 사람은 그보다 못한 성균관, 중인은 승진이 어려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무과(武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한양 양반은 왕을 호종하는 선전관(宣傳官)에, 중인은 궁궐이나 성문을 지키는 수문청에 임용되었다.
중인과 서얼
[편집]조선 후기의 중인은 인구 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는 부류로서 의관(의사), 역관(통역), 천문관, 산관(수학), 율관(법률), 화원, 서리 등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하급관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밖에 시골의 교생(校生)이나 군교(軍校), 향리들도 중인으로 자처하여 두 부류의 중인층이 형성되었다. 건국 초에는 전문 기술직에 종사하는 가문이나 신분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 그 직업이 세습되면서 중인이라는 특수 계급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서얼들에게 잡과 응시가 허용되어 전문 기술직에 함께 참여하면서 중인은 서얼과 동류로 취급되어 천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인은 법제상으로는 문무과 응시가 가능하고, 당당한 문관(顯官)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상으로는 청요직 임용이 막혀 있었다.
한편, 서얼은 양반의 소생으로 인구 비중도 높았으나, 서얼금고에 따라 전문 기술직 이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서얼들 자신의 꾸준한 집단적 상소운동과 국가의 정책적 배려로 18세기 후반부터는 점차적 청요직으로의 허용이 이루어졌다. 정조 때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된 것은 유명한 사례이며, 또한 그 후에도 서얼허용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851년(철종)에 ‘신해허통’ 조치를 거쳐 완전한 청요직 허통이 이루어졌다.
서얼 허용에 자극을 받아 중인(中人)들도 1850년대에 대대적인 연합 상소 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청요직 허용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인들은 경제력이 높아서 한양의 여러 곳에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양반들과 어울려 문예 활동을 통해 양반과 비슷한 인문교양을 쌓아가는 한편,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갔다. 중인들의 위상이 뚜렷하게 높아진 것은 개항 이후로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데 양반보다 앞서 나갔다. 그들이 지닌 전문적 지식과 출세 의욕이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급진적 개화파가 거의 대부분 중인층에서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에서 뒷날 친일파가 많이 나타난 것은 중인이 양반처럼 자존심이 강하지 못하고, 전문가로서의 공리적·출세 지향적 기질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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