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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레반트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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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레반트 정복
아랍-비잔티움 전쟁의 일부

2005년 팔미라의 로마 원형극장
날짜634년–638년
장소
결과 이슬람 세력의 승리
영토 변화 라시둔 칼리파국의 레반트 합병
교전국
라시둔 칼리파국 비잔티움 제국
가산족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라큼
지휘관

이슬람의 레반트 정복(아랍어: فَتْحُ الشَّام Fatḥ al-šām[*]; 직역:'시리아 정복'), 또는 아랍의 시리아 정복[1]은 서기 634년부터–638년까지 라시둔 칼리파국비잔티움의 시리아를 정복한 사건을 말한다.

방대한 아랍-비잔티움 전쟁의 일부로서, 레반트아랍계 무슬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고 빌라드 알샴이라는 행정구역으로서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레반트 남부 지역에서 벌어진 아랍과 비잔티움 간의 충돌은 서기 629년 무타 전투를 시작으로 무함마드 생애 내내 벌어졌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복은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2년 뒤인 634년까지 이뤄지지 않았었다. 정복 활동은 무함마드의 뒤를 초대 칼리프들인 아부 바크르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진행했었다. 이 시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라시둔 군대의 핵심적인 지도자이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붕괴 이래로 처음으로 539년에 이 지역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로마-그리스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를 거쳐 다시 한번 셈어파 구사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의 시리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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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무슬림들의 정복에 앞서 일곱 세기 동안 시리아는 로마의 통치 하에 놓여있었고 3세기, 6세기, 7세기 때 여러 번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았었다. 또한 라큼족 같은 사산조의 아랍 동맹 세력의 약탈 대상이기도 했었다.[2]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시작된 로마 시대 기간, 이스라엘 전역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은 '팔라이스티나'라는 이름이 명명됐고, 1 관구와 2관구로 구분되었다.[3] 로마인들은 또한 네게브, 시나이, 아라비아반도 서쪽 해안 등을 포함한 지역을 '팔라이스티나 살루타리스'로 명명했고, 때로는 '팔라이스티나 제3 관구' 및 '팔라이스티나 테르티아'라고 칭했다.[3] 일부는 동맹(symmachos)인 가산족의 통치를 받았다.[4]

로마-페르시아 전쟁마지막 전쟁 기간이던 603년을 시작으로, 호스로 2세 휘하 페르시아군은 10년 넘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점령해내지만 이라클리오스의 여러 승전으로 628년에 강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5] 이에 따라, 이슬람 정복이 시작되기 직전, 로마인들(오늘날 서양 역사학자들이 통상적으로 ‘비잔틴인’이라 부르는)은 해당 지역들에서 자신들의 통치를 회복하는 중이었고, 그중 일부 지역은 거의 20년 동안 통치 밖에서 이탈해 있었다.[5] 정치적으로, 시리아 지역은 안티오키아에서 사해 위쪽의 알레포까지 이어지는 시리아 본토 지방과 사해의 서쪽 및 남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등 두 지역으로 이뤄져 있었다.

시리아는 대부분 아람어그리스어 사용자들로 이뤄졌고 부분적으로 아랍인들이 있었는데, 주로 동부와 남부 지역에 있었다.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예멘에서 시리아로 강력한 가산족이 이주할 때까지 중요한 이들이 아니었으며, 가산족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후 로마의 봉신으로서 자신들만의 왕을 둔 준자치 국가를 이루었다. 가산 왕조는 로마 제국의 영예로운 봉신 가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가산족의 왕은 보스트라에 있는 수도에서 요르단과 시리아 남부의 아랍인들을 다스렸다. 가산족의 마지막 국왕은 이슬람의 침입 당시 통치하던 자로,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이었다.

비잔틴 황제 이라클리오스사산 제국으로부터 시리아를 재탈환하고 나서, 사해 남쪽 가자로부터 새로운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 방어선은 도적들로부터 교역망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뿐, 비잔티움의 방어선 대부분은 전통적인 적수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마주하고 있는 북시리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시리아 방어선의 후방은 남쪽의 사막으로부터 진입하는 무슬림들에게는 북쪽 끝 가자에 이를 때까지 비잔틴의 정규군을 마주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7세기는 비잔티움 제국에 있어 긴급한 군사적 변화가 일어난 때였다. 최근 로마-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후 기진맥진하던 제국은 아라비아로부터 새로운 적수를 마주하던 때 분명 붕괴의 상태는 아니었으나, 이 새로운 도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는 분명히 실패했다.[6]

칼리파국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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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과 군사적 충돌은 무함마드 생전부터 시작됐었다. 629년 9월 카라크주 요르단강카라크의 동쪽에 위치한 무타에서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군대와 비잔티움 제국군대 및 이들의 동맹 아랍계 기독교인 가산족 봉신 병력이 무타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슬람 측 사료에서, 이 전투는 보통 가산족의 관료가 부스라로 향하던 무함마드의 사절단을 처형함으로써 가산족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복 시도로 묘사된다.[7] 교전 중에 무슬림 병력은 퇴각하였다.[8][9] 무슬림 지휘관 셋이 전사하자, 지휘권은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에게 넘어갔고 그는 잔류 병력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8] 살아남은 이슬람군은 메디나로 퇴각했다.

632년 힛자툴 와다 (고별 순례) 이후, 무함마드는 우사마 이븐 자이드를 비잔티움 제국의 발카 지방을 침공할 예정이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 원정은 우사마 이븐 자이드의 원정으로 알려져 있고, 우사마의 아버지이자 무함마드의 양아들 자이드 이븐 하리타가 전사한 무타 전투에서 죽은 무슬림들의 복수를 하는 것이 표면상 목표였다.[10] 632년 5월/6월 우사마의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그의 군대는 비잔티움의 영토를 공격하여 약탈을 거둔 최초의 무슬림 군대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632년 6월에 죽고, 아부 바크르메디나에서 칼리프 및 정치 후계자로 지목된다. 아부 바크르의 계승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일부 아랍 부족들이 릿다 전쟁 (아랍어로 변절의 전쟁)중 그에게 반기를 일으켰다. 릿다 전쟁은 히즈라력 11년 때 벌어져 종료되었다. 히즈라력 12년이 도래하는, 633년 3월 18일, 아랍은 메디나의 칼리프 권위 아래 통일이 이뤄졌다.

아부 바크르가 전면적인 제국 정복을 의도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그러나 그는 역사적 흐름을 촉발시켰고, 그로부터 불과 몇십 년 만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 가운데 하나가 탄생하게 됐으며,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 장군이 이끈 페르시아 제국과의 대결이었다.

시리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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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둔 칼리파국의 레반트 침공을 나타내는 지도.

사산조를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거두며 연이어 이라크 정복을 해낸, 할리드는 이라크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사산 군대와 교전하는 동시에, 그는 또한 비잔틴의 가신이던 아랍계 가산족과도 부딪혔다. 곧 메디나에서는 아라비아반도 전역에서 부족 파견 부대를 모집했다. 릿다 전쟁 중 반기를 일으킨 부족들은 소집에서 배제되어 636년까지 라시둔 군대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우마르 칼리프가 야르무크 전투까디시야 전투 때 인적 자원이 부족하자 소집하였다. 부족 파견대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전통은 우마르가 상비군을 조직하는 636년 때까지 이어졌다. 아부 바크르는 병력을 네 개 부대로 조직하였고 각 부대의 지휘관과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아부 바크르를 상호 지원을 위해 연락을 이어나가라고 병력들에 명령했고 아부 우바이다를 총사령관으로, 야지드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11][12] 또한 그는 또한 야지드를 군사 구역 가운데 한 곳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윤리적·작전적 지침을 세세하게 부여하였다:

적들과 마주한다면, 신께서 자네들을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니, 사슬로 묶지도 말고, 신체를 훼손하거나 절단하지도 말며, 배신하지도 말라, 그리고 (패배자들을) 겁쟁이라 비난하지도 마라. 아이들과 노인 여성을 죽이면 안 되고, 야자수를 태우거나 뽑아서도 안 되며, 과실 나무를 베어내지도 말며, 먹을 목적이 아니라면 가축을 잡지도 말아라. 은둔처에 머물며 자신을 신[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은둔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은둔한 일에 대하여는 그들을 내버려 두라. 또한 자네들은 머리 한가운데에 마치 사탄이 자리 잡은 듯한 자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의 정수리는 마치 사막꿩의 둥지(afahīs al-qatā)와도 같이 되어 있다. 그들이 회개하여 이슬람에 귀의할 때까지 혹은 손수 조공을 바치며 겸손히 복종할 때까지 검으로 그들이 머리에 파놓은 둥지 같은 것들을 쳐라. 신은 반드시, 비록 그들이 눈앞에 없을지라도(bi-al-ghayb), 그분과 그분의 사도들을 돕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나는 자네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신의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13][14]

이 명령의 사실성에 대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James Moreton Wackeley는 이를 초기 이슬림 지도력을 이상화 하려는 의도가 담긴 문학적 장치로 묘사한 반면,[15] 알브레히트 노트는 이 문구를 널리 퍼진 전승의 일부에 대해서 후대의 전승자들이 사실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요한 초기 인물들이 한 것이라 회상하며, 도덕적 그리고 합법적 규범을 고취하기 위해 기존의 재료를 사용한 것이라 해석하였다.[16] 이러한 해석들은 이슬람 전승에 대해 역사적 비판 방식을 적용하고 있는, 폭넓은 세속적 학술 담론에서 제시된다.[17][18][19][20]

시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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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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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부크 너머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동하던 야지드의 부대는 소규모 아랍계 기독교인 병력과 접촉하게 되며, 이슬람 선봉대와 척후전을 벌인 뒤 그들은 퇴각하게 되고, 이후 야지드는 사해의 남쪽 끝과 접하는 아라바에 도착한다.

비잔티움의 주 방어선이 가자 인근 해안 지역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야지드는 아라바 계곡으로 갔고 같은 시기 아므르 빈 알아스가 에일라트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려는 야지드와 아므르의 부대를 막으려 비잔티움 측에서 파견된 두 선봉대는 이들에게 쉽게 패퇴당했으나 라시둔 병력이 정해진 목표에 도착하는 것을 막아내기는 했다. 다른 한편 아부 우바이다와 슈라빌 등은 진격을 이어나갔고, 634년 5월 초쯤 이들은 부스라자비야 사이 지역에 도달했다.[12] 비잔티움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아랍 제후들로부터 무슬림 병력의 움직임 소식을 듣고, 반격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라클리오스의 명에 따라, 북쪽에 있던 수비대의 비잔티움 병력은 아즈나다인(Ajnadayn)에서 집결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비잔티움군은 아므르의 부대과 교전하고 요르단과 시리아 남부에 있던 나머지 이슬람 병력의 측면 또는 후방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대략적 추정에 따르면, 비잔티움 군대의 병력은 약 100,000명이었다고 한다.[21] 아부 우바이다는 634년 5월 셋째 주에 비잔틴인들의 대비 소식을 칼리프에게 알렸다. 아부 우바이다는 이런 대규모 작전의 군 지휘 경험이 없었고 특히 강력한 로마 병력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 인 왈리드가 지휘권을 맡도록 결정하였다. 초기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에 의하면, 아부 바크르는 "알라에 따라, 나는 할리드 인 알 왈리드로 하여금 로마인들과 사탄의 친우들을 멸하려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2]

할리드 이븐 왈리드의 시리아 공격로를 나타내는 지도.

할리드는 즉시 6월 초 이라크알히라에서 본인 병력의 절반인 약 8,000명과 함께 시리아로 출발하였다.[12]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가는 경로가 두 개가 있었으며 하나는 두마트알잔달을 거쳐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락까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시리아의 이슬람군은 즉시 지원 병력이 필요했고, 이에 할리드는 도착까지 몇 주가 걸리는 장거리 경로인 두마트알잔달를 통해 시리아로 향하는 전통적 경로를 피했다. 메소포타미아 경로는 그 방향 및 시리아 북부에 로마의 수비대가 있어 그곳도 피했다. 무슬림 군대가 시리아에서 측면을 돌파당하고 있던 그 시점에 그들과 교전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할리드는 시리아 사막을 통과하는 비전통적 경로로 시리아로 향하는 짧은 길을 택하였다. 그의 병력은 사전에 지정된 오아시스의 수원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방울의 물도 없이 이틀을 진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할리드는 시리아 북부에 도착하였고 오른쪽 측면에서 비잔티움군을 추격했다. 현대 역사가들에 따라면, 이 기민한 전략적 기동은 시리아의 비잔틴 방어선을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23]

남부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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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타메르, 쿠라키르(Quraqir), 수와(Suwa), 아라크, 그리고 옛 도시 타드무르 등은 초창기 할리드에게 함락됐다. 알수크나, 알카르야타인, 화와린 등은 알카르야타인 전투와 화와린 전투 이후 점령됐다. 이 도시들을 처리한 뒤, 할리드는 현재 사니타알우캅(우캅 고개)로, 할리드의 군대 군기에서 이름 붙여진 산길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다마스쿠스에서 가산족의 수도인 부스라로 이동했다. 그는 나머지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부스라의 시리아-아리방 경계 인근으로 병력을 집중시키라 명령했다. 마라즈알라합(Maraj-al-Rahab) 지역에서 벌어진 마르즈라히트 전투에서 할리드는 속전속결로 가산족 군대를 제압시켰다. 한편, 시리아의 이슬람 총사령관인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는 슈라빌 이븐 하사나에게 부스라를 공격하라 했다. 슈라빌은 4,00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으로 부스라를 포위했다. 로마 및 가산 수비대는 이 병력이 다가올 거대한 이슬람 군대의 선봉대라는 것을 깨닫고 요새화 된 도시에서 나와 슈라빌을 둘러싸 공격했다. 하지만 할리드가 기병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였고 슈라빌을 구원했다. 할리드, 슈라빌, 아부 우바이다 연합군은 부스라에 대한 포위를 재개했고, 부스라에서 634년 7월 중엽에 항복하며 사실상 가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할리드 이븐 왈리드의 시리아 침공 경로를 나타내는 지리 지도

이때부터 할리드는 칼리프의 지시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로부터 시리아의 이슬람 병력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거대한 비잔티움 병력이 무슬림 침공군을 사막으로 밀어내기 위해 아즈나다인에서 집결하고 있었다. 초기 무슬림 사료에서는 비잔티움 병력이 90,000명이라고 했으나,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이 전투가 시라의 비잔티움 세력을 분쇄하는 데 핵심적이었다고 여긴다. 할리드의 지시로, 모든 무슬림 병력이 아즈나다인에 집결했고, 7월 30일 비잔티움군에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이 패배로 시리아는 무슬림 침입자들에게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다마스쿠스에는,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사위 토마스가 부임해 있었다. 다마스쿠스로 할리드의 진격 소식을 들은, 그는 방어 준비를 하는 한편, 에메사에 있던 이라클리오스에게 지원군 요청 서신을 보냈다. 추가로, 공방전을 위한 준비 시간을 더 벌기 위해 토마스는 다마스쿠스로 할리드의 진격을 지연시키거나 또는 가능하다면 막을 병력도 보내기도 했다. 이 병력 중 하나가 다마스쿠스에서 145km 떨어진 티베리아스호 인근 야쿠사 전투에서 패했다. 또 다른 병력은 8월 19일 마르즈알사파르 전투에서 패했다. 이 전투들은 의도한 효과를 거두어, 칼리드의 도착을 충분히 지연시켜 포위전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럼에도, 이라클리오스의 지원군이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을 때, 할리드는 8월 20일에 도착하여 공방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마스쿠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할리드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남쪽 도로에 그리고 다마스쿠스-에메사로 향하는 북쪽에 분견대를 배치하고,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경로에 소규모 분견대를 파견시켜 놓았다. 이라클리오스의 지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30km 떨어진 사니타알쿠압 전투에서 가로막혀 패퇴당하고 말았다. 할리드의 군대는 포위를 풀려는 로마의 세 차례 기습 공격을 버텨냈다. 할리드는 결국 공격을 가했고 30일 이후인 9월 18일에 다마스쿠스를 정복해냈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공방전이 실제로 네 달에서 여섯 달간 이어졌다고 한다. 다마스쿠스 함락 소식을 들은 이라클리오스는 에메사를 떠나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다마스쿠스의 시민들은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약조 받았고, 비잔티움군은 3일 동안 공격하지 않고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3일 뒤, 할리드는 기병들을 이끌고, 알려지지 않은 지름길을 사용해 로마군을 따라잡아, 다마스쿠스에서 북쪽 305 킬로미터 (190 마일) 떨어진 마라즈알데바즈 전투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칼리프 우마르 시기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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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드의 지휘권 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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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후계자로 두고 사망했다. 우마르의 첫 행보는 할리드의 지휘권을 회수하고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이슬람 군대의 새로운 최고 지휘권자로 임명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공방전 중에 이 내용을 알리는 서신을 받았으나, 다마스쿠스가 함락될 때까지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을 늦췄다. 이후, 할리드는 새로운 칼리프에게 본인의 충성을 맹세했고 아부 우바이다 휘하 지휘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아부 바크르가 죽고 우마르가 칼리프에 오른다면, 우리는 그의 명을 듣고 따른다."라고 했다고 한다.[24]

아부 우바이다는 한층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이동하였는데, 이는 시리아 내 군사 작전에 동반되는 영향을 미쳤다. 할리드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아부 우바이다는 그를 기병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전체 군사 작전에 있어서 그의 조언에 많이 귀기울였다.[25]

레반트 중부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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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시리아 중부 공격로를 나타내는 지도.

아부 우바이다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 지 얼마 안 있어, 그는 베이루트 동쪽 50 킬로미터 (31 마일) 거리에 떨어진 자흘레 인근 오늘날 아블라인 아부알쿠즈(Abu-al-Quds)에서 열린 축제에 작은 파견대를 보냈다. 그곳 근처에는 비잔티움 및 아랍계 기독교 수비대가 있었으나, 수비대의 규모는 이슬람 측 정보원이 잘못 알려준 상황이었다. 수비대는 재빨리 무슬림 파견대를 둘러쌌으나, 이들이 완전히 섬멸당하기 전에 할리드가 이들을 구원하러 도착했다. 새로운 정보를 받은 아부 우바이다가 할리드를 보낸 것이었다. 할리드는 10월 15일 전장에 도달하여 적군을 제압하고 축제에서 약탈한 수 톤의 노획물 및 수백 명의 로마 포로를 갖고 복귀했다. 시리아 중부를 점령한 이슬람 측은 비잔티움 측에 결정적 일격을 가하였다. 시리아 북부와 팔레스타인 간의 소통이 이제는 가로막힌 것이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해발 약 150 미터 아래 지점에 있는 파흘로 진격하기로 하였는데, 그곳에는 강력한 비잔티움의 수비대 및 아즈나다인 전투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이 지역은 비잔티움 군대가 동쪽으로 공격을 가하여 아라비아와 무슬림 간의 소통을 끊어낼 수 있는 지점에 있어 핵심적이었다. 게다가 그처럼 큰 규모의 수비군이 배후에 있는 상황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할 수 없었다. 선봉대를 지휘하던 할리드는 일단 파흘에 도착하였고 요르단강을 막아 평야를 물에 잠기게 한 것을 알아차린다. 비잔티움 측은 결국 635년 1월 23일 파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26]

팔레스타인 정복 (634년-6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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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슬람 병력은 슈라빌과 아므르가 팔레스타인 깊숙이 진격하며 레반트에 대한 정복을 강화했다. 베트셰안은 2월 티베리아스의 항복이 있고 나서 약간의 저항을 펼치다가 항복하였다. 팔레스타인 내 비잔티움 병력의 위치 및 규모를 파악하고 나서, 우마르는 부대 지휘관들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리며 야지드에게 지중해 해안가를 차지하려 명령했다. 아므르와 슈라빌은 비잔티움의 가장 강력한 주둔군이 있는 쪽으로 진격하였고, 제2차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아므르와 슈라빌은 두 개 부대로 나뉘어, 아므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정복을 마치기 위해 나블루스, 아마와스, 야파, 하이파, 가자, 유브나 점령하러 나섰고, 슈라빌은 아크레, 티레 등 해안 도시를 점령하러 움직였다. 야지드는 시돈, 아르콰, 비블로스, 베이루트 등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진격했다.[27] 635년경, 예루살렘, 카에사레아 마리티마, 아슈켈론 등을 제외한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남부 등은 모두 이슬람 손에 떨어졌다. 우마르의 명에 따라, 야지드는 카이사레아 포위에 나섰고, 야르무크 전투 무렵의 일시적인 포위 중단을 제외하면, 이 포위는 항구가 함락된 640년까지 계속되었다.

에메사 전투 및 제2차 다마스쿠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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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와 요르단에서 핵심적이었던 파흘 전투 이후, 이슬람군은 두 개로 쪼개졌다. 슈라빌과 아므르의 부대는 팔레스타인 점령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던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는 북부 시리아 점령을 위해 북으로 향했다. 한편 이슬람군이 파흘에 있는 동안, 기회를 엿보던 이라클리오스는 소규모 이슬람 주둔군이 남겨져 있던 다마스쿠스 탈환을 위해 테오도라스 장군 휘하의 부대를 급파했다. 파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고 얼마 안 있어 이슬람군은 에메사로 향하던 중에 있었다. 한편, 비잔티움 군대도 두 개로 나뉘어, 스키노스가 이끌던 부대는 마라즈 알 로메 (Maraj al Rome, (베카 계곡)에 배치됐고, 테오도라스가 이끌던 나머지 병력은 다마스쿠스 서쪽 (알사보우라)에 주둔했다.[28][29]

그 날 밤, 테오도라스는 기습 공격을 가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할리드의 첩자는 이 움직임을 할리드에게 알렸고 아부 우바이다로부터 승인을 받아 할리드는 기동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로 질주했다. 아부 우바이다가 마르즈 아르룸 전투에서 로마군과 교전해 승리를 거둔 한편, 할리드는 기병을 이끌고 다마스쿠스로 가 테오도라스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29][28] 일주일 뒤, 아부 우바이다는 거대한 유피테르 신전이 서 있던 헬리오폴리스로 향하였다.[30]

636년 5월, 헬리오폴리스는 약간의 저항을 펼치다가 연공을 바치기로 하며 이슬람군에 항복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에메사 쪽으로 할리드를 파견했다. 에메사와 할키스는 1년간 강화 조약을 제안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공격하기보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정복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마마아렛누만을 점령하였다. 안티오키아에 상당한 병력을 모은, 이라클리오스는 이들을 에메사 및 칼키스 같은 시리아 북부의 전략상 중요 지점으로 보내 강화하였다. 에메사의 비잔틴 증원군은 강화 조약을 깨트렸고,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는 그곳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할리드의 선봉대를 막아낸 비잔티움 군대는 패배하고 만다. 이슬람군은 에메사를 포위하여 두 달 만인 636년 3월에 정복해냈다.

야르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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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르무크 전투 이전 이슬람과 비잔틴 병력의 움직임
야르무크 전투(636년)에 대한 지형 및 전략 지도로, 중요 장소, 로마 및 이슬람 병력 위치, 도로, 하천, 평야 등을 나타내고 있다. Syvänne (2019), Kaegi (1992), GIS data 등을 포함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다.

에메사를 점령한 뒤, 할리드는 기병대를 선봉대 및 급습 부대로 사용해 시리아 북부를 점령하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샤이자르에서, 할리드는 칼키스로 가던 보급 수송대를 가로막았다. 포로들은 고문을 당해 그에게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시리아를 되찾으려는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야심찬 계획을 알려주고 말았다. 할리드는 즉시 급습을 멈췄다.

지난 기억을 통해, 이라클리오스는 무슬림 군대와 회전을 피했다. 그의 계획은 주요 도시들로 대규모 증원 병력을 보내어 이슬람군을 고립시킨 뒤, 무슬림 병력을 각개 격파하는 데 있었다.

이라클리오스의 계획 중 일부는 사산 제국의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의 군대와 협공하는 것이었다. 이라클리오스는 레반트에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는 한편, 야즈데게르드는 이라크에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라클리오스는 레반트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는 못했는데, 우마르는 아마 이 동맹에 대해 알고 있어, 야즈데게르드 3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으며, 겉보기에 그를 이슬람교에 귀의하도록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클리오스는 636년 5월에 공격을 가하자, 아마 정권 유지에 무리가 있던 야즈데게르드는 이라클리오스의 공세와 동참하지 못하며, 계획을 망치고 말았다.

다섯 개의 대규모 병력이 6월 시리아 탈환에 나섰다. 이라클리오스의 계획을 파악한 할리드는 이슬람군이 고립되어 각개격파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략 회의 중에 아부 우바이다에게 비잔티움과의 결정적인 일전을 치르기 위해, 흩어져 있던 무슬림 군대를 한 곳으로 모아 세력을 결집시킬 것을 제안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받아들이며, 자비야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움직임은 이라클리오스의 계획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는데, 이라클리오스는 정면전에서 병력들을 이슬람의 경기병과 교전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비야에서, 다시 한번 할리드의 제안으로, 아부 우바이다는 기병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야르무크강 평야로 무슬림군을 철수시켰다. 이슬람군이 야르무크에서 집결하는 동안,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선봉대를 가로막아 패퇴시키며, 안전한 후퇴로를 확보했다.

이슬람 군대는 7월 야르무크 평야에 도착했다. 1주 또는 2주 뒤인 7월 중엽에 비잔티움 군대가 도착했다. 비잔티움의 최고 지휘관 바한은 이슬람 군대의 병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가산족 왕 자발라 휘하의 가사족 군대를 보냈다. 할리드의 기동대는 야르무크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이들을 격퇴하여 몰아냈다. 양측 간 한달 동안 협상이 계속됐고 할리드가 직접 비잔티움 군영으로 협상을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 우마르가 보낸 이슬람 지원군이 도착했다.

전략 회의 중에 아부 우바이다는 무슬림 군대의 야전 지휘권을 할리드에게 넘겼다. 마침내, 8월 15일, 야르무크 전투가 벌어졌고, 6일간 교전이 이어지다 비잔티움군의 대패로 종결됐다. 이 전투와 이후 소탕전으로 비잔티움의 레반트 지배는 영원히 막을 내리고 만다.

한편, 우마르는 엄청난 기만 전술로 야즈데게르드 3세를 압도하였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야르무크 전투가 벌어진 지 세 달 뒤인 까디시야 전투에서 병력을 잃으며, 페르시아 서부 지역에 사산조의 지배가 끝나고 만다.

예루살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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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군대가 퇴각하면서, 무슬림들은 재빨리 야르무크 이전에 그들이 점령했던 영토를 탈환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포함한 고위 지휘관들과 회의를 개최했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로 하였다. 예루살렘 공방전은 네 달간 이어졌고, 예루살렘은 항복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는 우마르에게 항복한 것일뿐이었다. 아므르빈 알아스는 할리드가 술탄과 아주 닮았던 점 때문에 그를 칼리프인 것처럼 가장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할리드라는 인물이 알려져 있어서 우마르는 637년 4월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들이러 직접 와야만 했다. 우마르는 메디나의 대리자로 본인의 최측근 조언자 알리를 임명했다.[31] 예루살렘 함락 이후, 무슬림 군대는 다시 흩어졌다. 야지드의 군대는 다마스쿠스로 이동한 뒤 베이루트를 함락시켰다. 아므르와 슈라빌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나머지 지역을 함락하기 위해 떠났고, 아부 우바이다 및 17,000명의 정예군 지휘관이던 할리드는 시리아 북부 정복을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사전 편찬자 다비드 벤 아브라함 알파시 (1026년 이전 사망)에 따르면, 이슬람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성전산에 기도를 드리는 것을 비잔티움 측으로부터 방해 받고 있던 이 지역 유대인들에게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32]

북부 시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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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북부 시리아 공격로를 나타내는 지도.

에메사를 이미 손에 넣은, 아부 우바이다와 할리드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던 비잔티움 요새가 있는 칼키스로 향했다. 칼키스를 통해서 비잔티움 측은 아나톨리아, 이라클리오스의 고향인 아르메니아, 지역 거점 안티오키아를 방어할 수 있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기동대와 함께 칼키스로 보냈다. 사실상 함락이 불가능한 그 요새는, 황제 다음 가는 명성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메나스 휘하의 그리스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전통적 비잔티움의 전술에서 벗어나던 메나스는 칼키스에서 동쪽 5km 거리에 떨어진 하지르에서 이슬람의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할리드와 정면으로 마주쳐 무슬림 군대의 핵심 요소를 괴멸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로 이어진 하지르 전투는 우마르조차 할리드의 군사적 천재성을 칭송하게 만들었다고 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할리드는 진정한 사령관이다. 신이시여 아부 바크르에게 자비를 배풀시길. 그는 사람을 보는 눈에서 나보다 더 뛰어났다."[33]

아부 우바이다는 6월 쯤에 항복한 칼키스에서 할리드와 곧 합류했다. 이 전략적 승리로, 칼키스 북쪽 지역은 무슬림들에게 개방되고 말았다.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진격을 이어나갔고 알레포를 포위하여, 10월에 필사적인 비잔티움 군대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함락시켜냈다. 안티오키아로 진격하기 앞서,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안티오키아를 아나톨리아와 고립시키기로 한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들은 모든 있을 수 있는 비잔티움 군대를 소탕하기 위해 북쪽으로 분견대를 파견하고 알레포에서 50km 떨어진 주둔군 근거지 도시 아자즈를 점령하는데, 이곳에서 이슬람 군대는 동쪽으로부터 안티오키아를 공격하며 철교 전투가 벌어진다. 야르무크 및 다른 시리아 전선의 생존자들로 구성된 비잔티움 병력은 패배하고 안티오키아로 퇴각하였으며, 그 다음 이슬람 군대는 안티오키아를 포위하였다. 황제가 도울 것이라는 희망이 없던 안티오키아는 모든 비잔티움 시민들에게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안전한 통행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10월 30일에 항복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할리드를 보내는 한편 본인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타르투스, 자블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타키아안티레바논산맥 서쪽 해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할리드는 북쪽으로 이동해 저 멀리 아나톨리아의 키질이르마크강까지 북상하여 급습을 벌였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슬람이 도착하기 앞서 안티오키아에서 에데사로 떠났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지라아르메니아에서 필수 방어선을 구축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그러던 중에 그는 마라슈를 막 함락시킨 할리드가 만비즈를 향해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간신히 접촉을 피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급히 산악로를 택해 이동했으며, 킬리키아 협곡(킬리키아 관문)을 통과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잘 있거라, 나의 아름다운 속주 시리아여. 긴 이별이로구나. 이제 너는 이교도(적)의 땅이 되었도다. 시리아여, 평화가 있기를. 적의 손에 들어가서도 너는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것인가"[34]

비잔티움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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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피테르 신전 (레바논).

야르무크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난 뒤, 비잔티움 제국의 나머지 지역은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얼마 없는 군 자원이 사라지며, 시리아에서 군사적 반격을 시도할 만한 상태가 더 이상 되지 못하였다. 남은 지역에 대한 방어를 펼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라클리오스는 무슬림들이 시리아에서 발이 묶여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는 자지라 지역, 특히 키르케시움히트 출신 기독교인들 (일부는 아랍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이 기독교인들은 대군을 모아 아우 우바이다의 기지가 있는 에메사로 진격하였다. 아부 우바이다는 시리아 북부에서 에메사로 모든 병력들을 철수시켰고, 기독교인들은 포위에 돌입했다. 할리드는 요새 밖 야전을 선호했으나, 아부 우바이다는 이 문제를 우마르에게 알렸고, 우마르는 이라크에서 한 부대를 파견하여 세 갈래 경로로 자지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야르무크 전투의 베테랑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본래 까디시야 전투 참전을 위해 이라크로 보내진 카 카 이븐 아므르 휘하의 병력이 이라크에서 에데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우마르도 직접 1,000명의 병력과 메디나에서 진격하였다.

638년, 무슬림들은 히트를 공격하였고, 이들은 이곳이 잘 준비된 요새임을 알아차려서 군대의 일부를 남겨 도시에 대한 포위를 유지하게 하고, 나머지는 키르케시움을 향해 이동했다.[35]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의 자신들 고향 땅 침공 소식을 듣게 되자, 이들은 포위를 포기하고 급히 철수하였다. 이 시점에서 할리드와 기동대는 요새에서 튀어나와 후방에서부터 공격하여 이들의 부대를 괴멸시켰다. 638년 말, 이븐 왈리드는 또한 게르마니키아를 점령해냈다.

우마르의 명령으로, 이라크의 이슬람군 지휘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Sa'd ibn Abi Waqqas)는 이야드 이븐 가늠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서 우르파까지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게 했다. 639년–640년에, 락까가 무슬림들의 손에 떨어졌고,[36] 뒤이어 레반트 지역 동로마의 마지막 거점 지역인 자지라의 대부분도 평화적으로 항복하고 지즈야를 내기로 하였다.

아르메니아 및 아나톨리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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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드 이븐 왈리드와 이야드 이븐 가늠의 아나톨리아 공격 루트를 나타내는 지도.

자지라 정복은 640년에 완료되었고, 이후 아부 우바이다는 할리드와 이야드 이븐 가늠 (자지라 지역 정복자) 등을 자지라 북쪽에 있는 비잔티움 영토를 침공하라 보냈다. 이들은 각각 진격하여 에데사, 아미다, 멜리테네 (말라티야) 그리고 아라라트까지 이어지는 아르메니아 전역을 점령하였고 아나톨리아 북부와 중부 지역을 습격하였다. 이라클리오스는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지역과 아나톨리아 사이 완충지를 만들기 위해 안티오키아와 타르투스 사이의 모든 요새를 폐기하였다.

그러고 나서 오마르는 확장을 중단하고 당시 시리아 총독이던 아부 우바이다에게 통치를 확고히 할 것을 명하였다. 이 결정은 할리드가 군에서 해임되어 그의 군사 경력이 종결된 점, 그리고 다음 해에 닥친 가뭄과 전염병 때문에 내려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스만 칼리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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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둔 제국의 최전성기인 제3대 라시둔 칼리프인 우스만 시기 (654년)

우스만 칼리프 재위 기간, 콘스탄티노스 3세는 우마르 재위 때 무슬림들에게 상실했던 레반트를 탈환하기로 한다.[37] 전면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고 대규모 병력이 시리아 탈환을 위해 보내졌다.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 1세는 지원군을 요청했고 우스만은 쿠파의 총독에게병력을 보내도록 명령했으며, 이들은 현지 주둔군과 합류하여 시리아 북부에서 비잔티움군을 격파하였다.

645년–646년, 무아위야가 임명한 수피안 무지브 알아즈디(Sufyan bin Mujib Al-Azdi)는 비잔티움이 레반트 해안에 갖고 있던 마지막 거점인 트리폴리를 가까스로 점령하였다.[38]

우스만은 무아위야가 해군을 창설하는 것을 허가했다. 시리아를 거점 삼아, 무슬림들은 이 함대를 649년에 키프로스, 크레타, 로도스를 점령하는 데 사용했다.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으로 연례 벌어지는 약탈은 시리아를 탈환하려는 비잔티움의 시도를 꺾어 놓았다.[37] 654년–655년, 우스만은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위한 원정 준비를 명했으나, 655년 암살로 이어진 국내 불안으로 인해, 이 원정은 수 십 년 동안 지체되었다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들어서야 이뤄졌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라시둔 칼리프 시기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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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치자들은 시리아를 준드 디마슈크 (다마스쿠스), 준드 힘스, 준드 알우르둔 (요르단), 준드 필라스틴 (팔레스타인) (이후에 준드 킨나스린이 추가) 네 지역 (jund)으로 구분하였고[39] 아랍 주둔군은떨어진 별도의 군영에 배치되어 있었다. 무슬림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허용하였다. 도입된 세금에는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지주와 농부들에게 부과된 하라즈, 비무슬림들에게 국가의 보호 및 군역의 면제를 대가로 부과되는 지즈야 등이 있었다. 비잔티움의 행정 조직은 새로운 행정 체계가 설립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리스어는 정복 이후에도 50년 넘게 새로운 무슬림 영토에서도 행정 언어 지위를 유지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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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만암살알리의 칼리프 지목으로, 무슬림 제국 내 첫 내전이 발발하면서, 라시둔 칼리파국은 우마이야 왕조로 이어졌고, 시리아가 그 중심이 되었으며 다마스쿠스는 다음 한 세기 동안 그 수도로 자리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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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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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aron, M. (2007). 〈The decisive battles in the Arab Conquest of Syria〉. 《Studia Orientalia Electronica》 101. 297–358쪽. 
  2. "Syria."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 October 2006 Syria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보관됨 14 5월 2006 - 웨이백 머신
  3. Kaegi, 1995, p. 41.
  4. "Ghassan."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18 October 2006 Ghassan (ancient kingdom, Arabia)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5. "Iran."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 October 2006 Iran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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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El Hareir & M'Baye 2011, 142쪽.
  8. Buhl 1993, 756–757쪽.
  9. Kaegi 1992,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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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The Sword of Allah: Khalid bin al-Waleed, His Life and Campaigns: page no:576 by Lieutenant-General Agha Ibrahim Akram, Nat. Publishing. House, Rawalpindi (1970) ISBN 978-0-7101-0104-4.
  13. Scheiner, Jens; Hassanein, Hamada (2019). 《The Early Muslim Conquest of Syria: An English Translation of al-Azdī’s Futūḥ al-Shām》. Routledge. 75–76쪽. ISBN 978-1000690583. 
  14. Wakeley, James Moreton (2017). 《The Futuḥ al Sham of al Azdi al Basri Syrian narrative history》. Oxford–Mainz–Vienna–Princeton Graduate Exchange. University of Oxford. 7쪽. 
  15. Wakeley, James Moreton (2017). 《The Futuḥ al Sham of al Azdi al Basri Syrian narrative history》. Oxford–Mainz–Vienna–Princeton Graduate Exchange. University of Oxford.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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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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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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