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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라 히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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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라 히로미치
八原 博通
출생1902년 10월 2일
돗토리현 요나고시
사망1981년 5월 7일
성별남성
국적일본
학력일본 육군대학
경력일본 육군 제15군 참모, 일본 육군대학 교관,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
직업군인
소속일본 육군
야하라 히로미치 대령

야하라 히로미치(일본어: 八原 博通, 1902년 10월 2일 ~ 1981년 5월 7일)는 일본육군 군인으로,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 일본군의 고급 참모로 활약했다.

1902년 돗토리현요나고시에서 태어나 최연소로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는 미국에 주재한 경험이 있어서, 대전국인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에는 일본 육군 제15군 참모로서 버마 (지금의 미얀마) 공략 작전을 담당했으며, 그 뒤에는 일본 육군 대학 교관을 거쳐 1944년 3월, 오키나와의 방위를 담당하는 일본 육군 제32군의 고급 참모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선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를 보좌하고, 일본의 입장을 유리하게 할 생각으로 지구 전술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표면적 무용을 중시하는 당시의 일본군에 뭉개졌고, 대본영에서의 공격 재촉과 조 이사무 참모장의 정적 사고 때문에 약 1주간의 무모한 야간 돌격으로 변환되었다. 야하라의 생각대로 일본군은 큰 손해를 입고 마부니 고지까지 퇴각했고, 1945년 6월 23일 항복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 야와라는 지휘관 우시지마 미쓰루조 이사무의 할복 자살을 지켜본 뒤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1981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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