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인
김효인 金孝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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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효인 |
로마자 표기 | Kim Hyoin |
출생 | ? |
사망 | 1253년 |
성별 | 남성 |
국적 | 고려 |
직업 | 문신 |

김효인(金孝印, ? ~ 1253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1]이며,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이다.
생애
[편집]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으며, 1208년(희종 4) 문과에 급제했다.
1224년(고종 11) 대관서승(大官署丞)·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으로서 『보경사원진국사비 寶鏡寺圓眞國師碑』의 글씨를 썼다.
1231년(고종 18) 몽골인 2명이 항복을 권유하는 첩문을 휴대하고 평주(平州)[2]로 찾아왔다가 수감되었는데, 이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평주에 파견되어 몽골인들에게 첩문의 내용을 물었다.[3]
1235년(고종 22) 중서사인(中書舍人)·지제고(知制誥)로서 『월남사지진각국사비 月南寺址眞覺國師碑』의 글씨를 썼다.
1250년(고종 37) 좌승(左丞)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김응문(金應文)·이행검(李行儉) 등 40명을 급제시켰다.[4]
이후 관직이 병부상서(兵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지제고에 이르렀으며, 1253년(고종 40) 졸했다.[3]
사후, 아들 김방경(金方慶)이 부귀해지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5]
평가
[편집]『고려사』는 김효인의 성품에 대해 그의 아들인 김방경의 열전에서 '엄숙하고 굳셌다'고 평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예자(隸字,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과 사업(事業)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실력을 중외(中外)에 드날렸다.'라고 극찬을 마지않았다.
기타
[편집]『동문선』에 '삼일포(三日浦) 단서석(丹書石)'이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1수가 전한다.
“ | 刻碑鐫碣古猶多 / 비와 갈을 새기는 일은 옛날에도 많았지만 |
” |
가족 관계
[편집]- 증조 - 김이청(金利請)[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