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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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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endo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4월 13일 (월) 18:42 판 (역사의 연결고리가 빠졌다.)

마지막 의견: 10년 전 (Canendo님) - 주제: 역사의 연결고리가 빠졌다.

이유립의 독립운동 활동근거가 있습니까?

본문중 약력에서 독립운동가, 사학자. 로 표현하였으나, 위키백과의 이유립 내용은 물론, 그이외에 다른 곳을 찾아봐도 이유립이 '독립운동' 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겨우 나온거라곤 1938년에 고향인 삭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더군요. 근거가 있다면 제시가 필요한듯 합니다. Nunting 2007년 8월 28일 (화) 16:53 (KST)답변

내용 확인은 '이유립' -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참조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8월 28일 (화) 22:14 (KST)답변

이런 얘기가 있네요. http://orumi.egloos.com/3384738 "이유립의 친일단체 가입 건". 한 대목만 인용합니다.

이유립이 가입한 조선유교회는 친일유학자들이 모인 단체고, 이유립의 글이 실려있는 일월시보에는 재등실(斎藤 実:사이토 마코토)이 격려 친필 족자를 보내기도 한 것. 재등실이 누구냐? 3.1 운동 후 조선에 부임해서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한 전직 해군대장. 그는 조선 통치의 성공으로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의 제30대 총리(1932.5.26-1934.7.8)를 지냈다.

또한 일제가 식민통치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조선"이라는 잡지에 기고도 했으며, 동아일보가 적극적인 친일신문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평북 삭주 지국장도 맡았다는 얘기가 있네요. http://munbba.egloos.com/437707 http://orumi.egloos.com/3295507

진실은 저너머에~~ Atreyu 2007년 9월 12일 (수) 18:03 (KST)답변

현재 문서에는 '민족운동가'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 '친일'이 붙는지의 여부는 토론을 통해 독자적으로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확인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닌 이상 위키백과의 출처로 이용되기는 어렵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1일 (월) 12:11 (KST)답변

이유립 선생님이 친일했다는 증거는 있나요

논리의 비약이 심하시네요 이유립 선생님이 일본을 찬양했나 일제시대에 관리를 지냈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단체에서 활동한게 친일증거 인가요 고작 일본인이 운영하는 단체에서 활동한게 그게 친일증거라? 그럼 기독교 다니는 사람은 친미주의자인가 구체적 논거없이 생사람 함부로 잡는짓은 하지맙시다 계필사력 2007년 10월 25일 (금) 14:55 (KST)답변

이유립이 일제를 찬양하며 일제의 정책에 적극 동참한 증거는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링크로 가보세요. 이유립의 약력 및 일제 찬양 글 · 조선유교회란 무엇인가--Xakyntos (토론) 2008년 7월 25일 (금) 16:43 (KST)답변

대량 편집시

전체적인 내용이 편집되었다면, 토론란이나 편집요약에 간단하게라도 언급이 남겨져야 할 것입니다. '편집은 과감하게, 변경 내용은 관심 있는 사람이 알아서 찾아내기'식이라면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1일 (월) 12:37 (KST)답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유념하겠습니다.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1일 (월) 16:30 (KST)답변

주장에는 출처가 필요합니다.

'고대 사서이므로 당시의 숫자 관습에 따라 1억은 10만을 뜻하며 8천만의 '만'은 필사 과정의 오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주장에 대한 출처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본 내용은 토론란으로 옮기겠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5일 (금) 02:42 (KST)답변

고대숫자 부분입니다. 필사 오류 주장은 지금 책이없으니 나중에 가져오죠 :) 대충 '억조창생'등 머릿셈으로 10^4법이 쓰이지 않던 시대인데다 당시의 국가가 당시 지구의 총인구보다도 많은 1억8천만 호(머릿수로 10억이상)의 인구를 갖는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고, 필사 과정에서 10^4법에 익숙한 사람이 1억 8천에서 8천이 1억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고 간주하여 없는 만을 덧써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퇴프 2007년 10월 7일 (일) 13:09 (KST)답변

모든 것을 필사 오류로 돌릴 수 있다면 위서의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개인연구'가 아닌 출처가 있으면 될 듯합니다. jtm71 2007년 10월 7일 (일) 17:23 (KST)답변

출처가 제시되기 전까지 해당 내용을 이곳에 보관하겠습니다.

  • 고대 사서이므로 당시의 숫자 관습에 따라 1억은 10만을 뜻하며 8천만의 '만'은 필사 과정의 오류로 보는 견해도 있다.

jtm71 2007년 10월 21일 (일) 00:17 (KST)답변

저자가 삭제된 이유

저자 항목이 삭제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 《환단고기》는 진위논란이 있는 서적이기 때문에, 저자에 대한 정보는 책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합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앞서 '토론:환단고기## 14 이유립의 독립운동 활동근거가 있습니까?'에서 논의가 있었던 내용입니다. jtm71 2007년 10월 7일 (일) 17:17 (KST)답변

각 저자의 독립페이지에서 소상하게 나올 뿐더러, 저자의 정보가 책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입니다.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7일 (일) 21:51 (KST)답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술 당시의 상황이나 저자의 삶의 진실성은 해당 저서의 진위를 판별하는데에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많은 《환단고기》를 설명하는 글[1][2]에서 그 저자의 행적이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주장하시겠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0월 8일 (월) 01:53 (KST)답변

환단고기 뿐만 아니라, 어떤 책을 누가 지었는가를 아는 것은 책의 주장하는 바와 책을 쓴 이유 등을 파악하는 1차 정보입니다. 보수적인 사람이 쓴 책이냐, 진보적인 사람이 쓴 책이냐에 따라서 내용을 비판적으로 읽고 검토하는 첫 번째 단추가 됩니다. 에르빈 롬멜이 대표적인 예인데,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롬멜을 포장하기 위해 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거품"이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책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파악해서 읽어보는데 역시 누가 썼느냐를 알면 1차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죠. --WaffenSS 2007년 10월 8일 (월) 03:10 (KST)답변
저자의 정보가 해당 서적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해당 부분에 담겨있던 내용이 해당 저서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8일 (월) 03:28 (KST)답변

'위키백과'의 목적은 정보를 공유하자는 것 아닐까요 ... 이는 독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직접적으로 판단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도 관련된 정보를 남겨놓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라진 부분은 《환단고기》와 관련이 없는 정보가 아닙니다. jtm71 2007년 10월 8일 (월) 04:50 (KST)답변

민족운동가로, 1930년대 후반 《일월시보》 주필,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 이후로 단단학회(檀檀學會)의 회장이 되어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 1976년에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였다. 1979년 음력 10월에 필사 영인본인 한문본 《환단고기》(광오이해사)를 간행하였다.

도대체 이 내용이 해당 저서를 판단하는데 어떠한 정보를 제공하나요-_-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8일 (월) 06:50 (KST)답변

링크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내용이 '정보'가 아니라는 주장입니까 ... jtm71 2007년 10월 8일 (월) 08:48 (KST)답변

저자에 대한 정보에 해당하지만, 해당 저서를 판단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기 힘든 정보가 아닙니까. 해당 저서와 관련하여 어떠한 특기사항은 없어 보입니다.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8일 (월) 09:51 (KST)답변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은, 《환단고기》라는 책이 진위판별을 놓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과거가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현재의 역사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위서의 시비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만큼 그 등장 배경이나 출처 등에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지는 책입니다. 《환단고기》가 어떤 책이냐,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는 의문을 가진다면, 당연히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저자에 대한 정보는 최소한, 저 계연수나 이유립이라는 사람의 문서를 들여다보아야 할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일월시보》나 1930년대 후반의 '동아일보', 단단학회, 《커발한》 등은 이들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이유립의 활동의 성격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8일 (월) 17:00 (KST)답변

의견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저자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라는 글이라도 끼워두면 되지 않을까요? --퇴프 2007년 10월 8일 (월) 17:29 (KST)답변

현재 저자에 대한 내용을 삭제하는 대신 '참조' 글을 남겨 놓고, 고유 링크를 각 문서로 이동시키는 방법도 있을 듯합니다. (원칙적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위키백과에서 유용한 정보를 없애는 방향으로 편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jtm71 2007년 10월 9일 (화) 01:16 (KST)답변

현재 저자 페이지에는 없으면서 지워진 내용이 있나요? 그렇다면 마땅히 저자 페이지에 보충해 넣어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저자에 관한 내용은 원칙적으로 저자 페이지에 있어야 하겠죠 :) --퇴프 2007년 10월 9일 (화) 02:19 (KST)답변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이 끝나면 보존문서로 이동하는게 낫겠습니다. 너무 길어진듯 합니다.--퇴프 2007년 10월 9일 (화) 02:20 (KST)답변
토론:환단고기/보존문서1로 이동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18일 (목) 19:59 (KST)답변

하지만, WaffenSS님이 지적하신 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동해#명칭처럼 간단한 언급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원문'은 해당 페이지에 있습니다. 의견충돌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일단 내용은 옮겨놓았습니다만, 관련된 저자의 정보는 어떤 형태이건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jtm71 2007년 10월 9일 (화) 02:58 (KST)답변

현재 환단고기 항목의 저자에 대한 내용과 동해#명칭의 내용은 전혀 성격이 달라보이는군요. 후자는 정말로 필요한 항목으로 보입니다만, 전자는 제가 보기에 쓸모가 매우 낮은 부분으로 보입니다.  천어 / 토론 2007년 10월 9일 (화) 03:20 (KST)답변

명확한 기준이나 이유도 없이 '매우 낮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가 아닐까요 ... 주장하시는 내용은 '~보입니다' 뿐이고 ... (관련 지침/관련 정보1 참조) jtm71 2007년 10월 9일 (화) 08:55 (KST)답변

특별히 이번 토론을 통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1. 명백한 오류나 반달행위 등의 문제가 될 우려가 없는 이상, 삭제의 내용이 사소한 것이 아닌 경우 다른 기여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실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2. 기여의 내용이 이유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삭제된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려는 의지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jtm71 2007년 10월 9일 (화) 03:13 (KST)답변

북한 학계 관련 일부 내용 이동

'《규원사화》와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단기고사》 등을 국사연구 서적에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으나, 2천 년 간 47대로 《환단고기》와 거의 유사하게 설정된 《단기고사》의 연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전조선, 후조선의 구분은 채택하였다. 참조: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북조선 사회과학출판사와 남한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펴냄, 2001년 3월, 40쪽 등 참조'

이는 《단기고사》에 해당되는 내용이므로, 《단기고사》 문서로 옮깁니다. jtm71 2007년 10월 11일 (목) 06:58 (KST)답변

출처 요구

'이것은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를 일본인의 역사로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의 덧붙여진 내용에 대한 출처를 요구합니다. 어떻게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吾鄕淸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며 극찬하고 우익 또한 환영하였으나, 이것은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를 일본인의 역사로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지 근거가 필요합니다. jtm71 2007년 10월 11일 (목) 07:07 (KST)답변

해당 내용을 삭제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17일 (수) 02:37 (KST)답변

본문의 환단고기#진서론 두번째 항목의 출처가 필요합니다. jtm71 2007년 10월 21일 (일) 00:25 (KST)답변

작성자에게 출처를 요구했습니다. :) --정안영민 2007년 10월 21일 (일) 00:36 (KST)답변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해당 내용을 토론란으로 옮깁니다. jtm71 2007년 10월 27일 (토) 10:29 (KST)답변

  • 기존 학계가 밝혀내지 못한 내용들이 있다.
    • 《환단고기》는 고조선의 위치, 정부 형태, 정치 제도, 풍습 등과 부여의 건국과 역사, 고주몽의 계보, 발해의 건국 비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화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환인, 환웅, 단군 등을 특정한 사람이 아닌 군장의 지위로서 각 시대에 대한 역대 계보를 제시하였다.
    • 20세기 초엽에 발굴된 중국 선사 시대의 유적들이 환국과 배달국과 유사한 시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편집시 '중립 유지'에 주의

어떤 생각에서 본문 내용이 편집되었는지는 이해합니다만, 맞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중립성 유지', '출처 제시', '독자연구 금지' 같은 위키백과의 원칙을 지켜야만 합니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본문 내용에서 스스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확하게 따지자면, 블로그의 내용도 특수한 경우 외에는 참조가 되지 않습니다.) jtm71 2007년 11월 4일 (일) 12:49 (KST)답변

내용이 중복되는 것도 있고,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해당 내용을 이 곳에 옮깁니다. (일반적으로 개인 블로그의 글은 위키백과의 출처가 될 수 없습니다.) jtm71 2007년 11월 11일 (일) 14:05 (KST)답변

(그러나 범례에는 "...그런데 또다른 단군세기가 세상에 전하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이 앞 책과 매우 다르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또다른 단군세기란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진 단군교의 경전을 말하는데, 이 책은 계연수가 죽은지 17년 뒤에 나왔다.)
현재 《환단고기》는 1940년대 이유립에 의해 창작된 위서로 판단된다.

본문으로부터 이동

주석으로 처리되었던 다음 내용을 출처 불명으로 본문으로부터 옮깁니다. jtm71 2007년 11월 21일 (수) 18:12 (KST)답변

「환단고기의 가치성」(http://bluecabin.com.ne.kr/investigation/hdvmain.htm)

14대 천왕명칭에 관하여

14대천왕(기원전 2707),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 두 명칭은 흥미로운 사실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다른 여러천왕들의 명칭이 중국사료에 나타나지 않지만, 치우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군신 또는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오지란 명칭은 중국측 사료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둘 다 각각 중국과 한국에서 한자로 적혀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고유명사의 음사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동사 및 명사의 말밑[語根]중에는 인도유럽계통과 또는 그 어족형성이전기의 단계(nostratic languages)를 공유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적쟎게 있는데, 위의 두 명칭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말로 들 수 있습니다. 치우의 옛소리값을 재구하면, 시우/디우[*s/diu] 쯤으로, 자오지는 사오시/댜오시[*djaos-i] 쯤으로 다시 짜여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구어학에서는 Ablaut 또는 apophonie 등으로 일컫습니다. 먼저 우리말의 치우(〈 *diu-)는 라틴말의 ju-piter 옛도이치말의 Zio (게르만 군신) 그리고 옛인도말인 리그베다에서는 diva 또는 dyu '하늘, 날'와 소리 및 뜻의 짜임새가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명칭인 자오지(〈 *dieiu-si)는 라틴말의 deus, 헬라말의 Zeus, 리그베다속의 deva 또는 dyava- '하늘의 신[天王]'과 소리나 뜻이 매우 일치해 보입니다.

두 어휘의 관계를 음운형태론적(Ablaut관계)으로라도 의미론적(군신 또는 하늘의 신[天王])으로라도 우연(?)으로 보기에는 적어도 비교언어학적 관점(본인은 3명(독일 2명, 미국 1명)뿐인 한국인인구어비교언어학전공자임)에서는 큰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자오지"란 명칭관련 다른 정보가 있으신 분들의 견해을 듣고 싶습니다. --밝은하늘 2007년 12월 28일 (금) 07:00 (KST)'답변

독자 연구 금지에서 볼수 있듯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썰을 풀어 내는것은 안됩니다. 여기는 역사/언어 연구 사이트가 아니라 백과사전 이거든요. '확인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Nunting (토론) 2008년 6월 6일 (금) 16:26 (KST)답변
그리고 치우가 인도유럽어족의 dyeu-와 관계 있다고 해도 환단고기의 진실성을 나타내는건 전혀 아니거든요. 기존 학설인 '묘족의 군신' 이라고 해도 별로 논리적으로 문제될게 없고, 그것이 환단고기와 어떠한 논리적 인과관계를 연결시켜주지도 않거든요. 오히려 이런 얘기는 치우 문서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Nunting (토론) 2008년 6월 6일 (금) 16:38 (KST)답변
慈烏支 말 그대로 풀자면 “까마귀 다리(또는 꼬리)”입니다. ㅡㅡ; 慈烏(까마귀) + 支(몸의 일부, 특히 몸의 끝으로 풀이하는 다리나 꼬리). --Knight2000 (토론) 2008년 7월 25일 (금) 18:21 (KST)답변

천왕이란 명칭이나 일부사람들 쓰는 한웅 명칭보단 환웅이란 명칭이 적절하지 않을가요 사용자토론:계필사력토론 2008년 7월 25일 (금) 14:58 (KST)답변

부여 관련 내용 이동

위키백과:삭제 토론/틀:부여왕에 따라, 해당 내용을 본 문서로 합병·이동하였습니다. 해당 문서들의 최초 생성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해모수: 2008년 3월 12일 (수) 12:08 222.117.158.203
  • 모수리: 2008년 3월 14일 (금) 09:05 222.117.158.203
  • 고해사: 2008년 3월 14일 (금) 09:05 222.117.158.203
  • 고우루: 2008년 3월 14일 (금) 09:20 222.117.158.203
  • 고두막: 2008년 3월 13일 (목) 10:32 222.117.158.203
  • 고무서: 2008년 3월 13일 (목) 11:25 222.117.158.203
  • 고진 왕: 2008년 3월 13일 (목) 11:47 222.117.158.203

jtm71 (토론) 2009년 1월 18일 (일) 20:36 (KST)답변

이덕일의 진서론 삭제 사유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덕일은 이상룡의「서사록(西?錄)」과 박은식의「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이상룡·박은식·신채호(申采浩)가 그랬던 것처럼 계연수(桂延壽)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 애국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선교 계열의 고서류를 참고해『환단고기』를 편저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주석 : 이덕일,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과연 후세의 위작(僞作)인가?,『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編【2002년版】

이덕일의 해당 주장은 위서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편 매우 무식한 주장입니다. 위서(僞書)란 책 자체의 정체가 표방하고 있는 것과 다른 책을 말합니다. 이상룡의 《서사록》이나 박은식의 《동명왕실기》와 같은 책들은 이상룡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직접 쓴 책이라는 책 자체의 정체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위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1911년에 썼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증거가 전무하고 1911년 이후에 쓰인 증거가 나오기 때문에 위서입니다. 계연수가 편저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서인 콘스탄티누스의 위임장은 위임장의 내용이 어떻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위임장 자체가 위조되었다는 것이 위서로 판명된 이유였습니다. 이덕일의 해당 주장은 이와 같은 위서의 정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명백하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삭제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5월 4일 (월) 18:27 (KST)답변

그것이야 그쪽 사용자분의 생각이지요. 강요하시지 마십시오. 주장이 어떻든 자료와 출처가 있다면 이런 설이 있다 정도의 의견으로 제시할수 있는 것입니다. --100범 (토론) 2009년 5월 4일 (월) 19:03 (KST)답변
여기서 다시 논쟁이 되는군요. 님은 무슨 이유로 강경한 어투를 쓰는지 모르지만 '무식한 주장'이란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나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위에 인용된 '근대 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다'라는 김막순의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라는 내용도 삭제되야 옳겠지요. 왜냐하면 이덕일도 '위작(僞作)과 가필(加筆)은 같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고 이런 논의를 폈기 때문이지요. 위작이라는 판결은 누가 내리는 것이지요? 묻고싶습니다. '강단사학자'들만 대한민국의 국민인가요? '재야사학자'들은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겁니까? 박사학위가 거져 얻는 것은 아니지요. 님과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자유도덕행위자'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모독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곳의 규칙에 맞게 수정이 된 것을 임의로 삭제하는 것은 무슨 권한입니까? 紫桃꽃 2009년 5월 4일 (월) 18:52 (KST)
단순 '주장'이니까 실어주고 거기에 대한 반박을 추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adidas (토론) 2009년 5월 4일 (월) 18:55 (KST)답변

사과드립니다. 제가 너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자의적인 편집을 한 것 같습니다. 책임을 인정하며 사과드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당 내용을 인정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키백과의 지침에 따라 작성된 글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삭제한 점은 스스로 반성합니다. 죄송합니다. --Xakyntos (토론) 2009년 5월 4일 (월) 21:30 (KST)답변

출처 관련

논란이 있는 내용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사용해야 합니다. 비전공자의 글은 신문에 게재되었다 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일부 인터넷 신문은 참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08:04 (KST)답변

동의합니다. 최근에 사용자:HanKooKin님이 출처가 부족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닌 글들을 근거로 하여 비중립적인 편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추측성 편집을 남발하고 있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아래는 제가 삭제한 추측성 편집 또는 비중립적인 편집 부분입니다. 해당 추측을 직접 전개한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없다면 명백한 독자연구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 통일이후가 더 큰 논란이 예고되고 있다.

  • 하지만 아직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중략) 남한에서는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 사이에 위서논란이 계속되면서 사료적 가치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으나
  • 이런 평행선을 달릴 것 같은 대립에 최근 의미 있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추측성 편집의 남발이라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갖추면서 글을 써주세요. 비중립적의 시각이라면 다른 내용을 올렸겠지요. 과거에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현재 남북한간의 견해가 상반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강단 학자와 재야 학자간에는 견해가 완화해 가는 추세에 있다는 뉴스 기사내용이 있어 수정.편집하였던 내용입니다. Jtm71님의 의견대로 기사인용에 있어 약간의 출처가 불분명하였지만 수정,보완하였습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5일 (화) 10:16 (KST)

백과사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국의 대표적인 백과사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를 참조해 보면, '환단고기'와 함께 참고문헌으로 채택한 것들은 사학계의 논문들이며, 그 내용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겠습니다만, 모두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前)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입니다. 북한의 연구는, 가장 최근의 연구가 2006년 남북 공동 논문집에서 발표한 문혁 연구원의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인데, 이 또한 《환단고기》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보도 내용을 인용하여 '~한 주장이 있다.' 정도로는 서술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지의 비중을 고려하여 양적으로도 적절하게 서술되어야 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10:36 (KST)답변

이곳 문서의 내용이 복잡한 모습을 보여 정리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오해를 가져왔던가 봅니다. 예를 들어 이성시의 인용논문은 긍정적인 시각인데 부정적으로 인용하는 것같고, 환단고기에 대한 남북한의 견해가 변화되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보는 것같아 수정.편집을 하였던 겁니다. 다소 출처에 있어 불분명한 것은 인정하지만 없는 얘길 추측하여 수정.편집한 내용은 없습니다. 이해바랍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5일 (화) 10:52 (KST)

이상시님의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서도 언급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의외였다고 생각된 점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환단고기》를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단군실사'라 부르고 '국사 교과서에 그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jtm71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10:57 (KST)답변

변호사출신의 사학자 이상시는 그다지 신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해도 단군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봅니다만 이곳은 환단고기의 문서이니 그 비판을 인용한 것같군요. 이성시씨는 요새 양비론 같은 입장을 취하며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같은 시각으로 보아 과거와 모순되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뢰를 접고 차라리 언급이 안되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비판으로 보아 위서쪽으로 인정하는 목록으로 본다는 것이 애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북한 학자 문혁의 2006년 연구논문으로 북한지역의 환단고기에 대한 전체의 의견으로 보기엔 무리가 아닌가요? 참고로 이미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내용을 첨부해 봅니다.([3],[4],[5],[6])紫桃꽃 2009년 5월 5일 (화) 11:35 (KST)

한국일보 보도 내용은 2005년이고, 기사에 언급된 정영훈 연구원의 글이 포함된 논문집은 2006년에 발표된 것입니다. 논문집에는 여러 남·북한 학자들이 참여하였으므로 상호 검토가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논문집에는 《환단고기》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논문집 제목은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仙家계 사학에 대한 남북공동연구》입니다. 참조 바랍니다. jtm71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13:16 (KST)답변

님에게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곳 한글 위키백과를 찾으면서 느끼는 것은 찾으면 찾을 수록 환멸을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어떤 자는 '환단고기'의 '환'자만 들어도 적대감이 느껴지는지 말을 함부로 하네요. 환단고기를 긍정하면 간악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간악(奸惡), 간사하고 악독함'을 말하더군요. 환단고기를 들먹이는 것이 정치적,종교적,정신적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고 같은 한국사람끼리 여기서 승리를 해서 무엇하고 이겨본들 무엇한다는 것인지, 그저 잘못되고 편협된 정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찾는 것뿐인데 이곳에서의 느낌은 씁쓸할 뿐입니다.紫桃꽃 2009년 5월 5일 (화) 15:54 (KST)
환단고기만 보면 열폭해서 까려는게 아니라,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현 상황에서 환단고기를 무조건 믿으려는 모습에 제동을 걸 뿐이라고 보여집니다만. adidas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16:09 (KST)답변
이곳을 찾는 사람이 세살먹은 사람도 아니고 환단고기를 믿는다는 사람도 박사급 학자들이 부지기수인데 무엇에 제동을 건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그냥 상대방의 서로 입장차이만 인정해주고 살자는데 뭐가 문제이지요? 紫桃꽃 2009년 5월 5일 (화) 17:08 (KST)
환단고기를 믿는다는 박사급 학자들 가운데 역사학을 정통으로 전공한 사람은 이덕일과 같은 수준 낮은 역사 소설가 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경우 역사학을 곁다리로 배운 전혀 다른 전공의 박사들이지요. 심지어 북한 학계에서조차도 Jtm71님께서 보여주셨다시피 《규원사화》는 몰라도 《환단고기》는 위서로 보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자도꽃 님께서는 제대로 역사를 공부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에서나 겨우 다수를 점하고 있을 뿐인 재야사학 계통의 이야기만 접하고 계신 겁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조차도 진지하게 역사적으로 환단고기를 연구하신 여러 분들의 노력으로 환단고기의 허구성이 많이 알려져 있지요. 자도꽃 님께서 올바른 위키백과 편집자가 되시려면 제가 보기에는 재야사학 계통의 이야기만 찾아다니실 것이 아니라, 재야사학을 비판하고 있는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셔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반박들에 대하여 모두 인식하고 난 후에도 재야사학이 옳다고 여겨지실 때, 그리고 반박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를 찾으셔서 위키백과를 편집하실 때 진정한 백과사전이 되겠지요. 재야사학에 대한 비판에는 귀를 닫으신 채 재야사학의 이야기만 듣고 백과사전을 편집하려 하시는 것은 그다지 중립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적어도 재야사학의 이야기들도 대부분 접하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가 가진, (조금 귀에 거슬리시겠지만) 정말 X같은 진실을 알고 있지요. 그렇기에 재야사학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입니다. 진짜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재야사학과 같은 X같은 것이 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진심으로, 이 글을 한 번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환단고기의 진실이 무엇인지. 이유립의 친일행각, 위서에 대하여 1, 위서에 대하여 2 언젠가는 자도꽃 님도 재야사학의 진실을 깨닫게 되실 때가 올 겁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군요. 조금 거슬리는 이야기를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5월 5일 (화) 23:15 (KST)답변
대충 어느정도의 성향도 알았고 인터넷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었으니 그만 합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무지 몽매한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진실처럼 얘기해본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다 생각이 있는 성인인데 개인 판단에 맡겨야 하지요. 님은 그저 님의 방식대로 생각하며 살면 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미친사람들처럼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님의 글을 읽어보니 마치 재야사학자란 사람들이 사악한 악의 소굴에서 나라를 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위와 같은 님의 주장은 님의 생각으로만 족합니다. 그들은 최소한 이정도까지 강단사학자와 추종자들을 생각지는 않는 것같군요. 또한 재야사학자를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하는 이런 류의 쌍스런 욕을 듣게 될 정도의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위의 글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그리고 이데오르기같은 사상도 아니고 병적으로 보일만큼 알레르기같은 반응입니다. 재야사학자와 고대사 관심자들이 하늘에서 갑짜기 내려온 사람도 아니고 다 똑같은 교과서를 갖고 10여년 이상 고대사를 배워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 민족의 잊혀져가는 역사와 어디에 남아 있을 잃어버린 유물을 찾아야겠다는 자각이 들었겠지요. 아마도 그게 전부일 겁니다. 친일행각은 과거 강단사학자라고 불리는 학계의 주류들이 더 많이 했던 것으로 아는데 이상하게 재야사학을 친일사학으로 몰고가는 느낌이 드네요. Xakyntos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배척하는 것은 좋은데 배운 사람답게 위와 같은 내용을 더이상 보여주지 않길 바랍니다. 정말 없어 보입니다. 다 같은 국민이고 동족인데 해방후 혼란기의 좌우익 싸움도 아니고 아무 의미없는 비생산적인 일이지요. 님도 좋은 의미에서 이런 글을 썼다고 느끼기에 그 진심만은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청하건대 서로간 생각이 다르더라도 조금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01:40 (KST)
친일 부분에 대해서는 애초에 자도꽃 님이 xakyn님을 일빠로 매도한 것과 관련해서 이해하면 좋겠네요. 분명 이병도 같은 친일인사도 있지만 그들의 친일경력만 가지고 '친일파들이 단군조선의 위대한 역사를 모두 없앴다'라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죠. 이유립 같은 사람 역시 친일행각을 벌인 바 있지 않습니까. 아울러 재야사학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좋은데, 고조선의 위대한 역사 운운하는 것이 히틀러의 인종주의적인 주장(아리아 인종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종이고, 그것의 역사적, 생물학적 근거 제시가 가능하다)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차라리 전 중고교 국사 시간에도 환단고기 같은 '재야사학'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네요. 애초에 주류 국사학계에서 무조건 무시하다 보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환상'만 가지는 역사 전공 지망생들을 주면에서도 꽤 많이 보기도 했고요.
사실 저도 그런 '환상'을 가진 지망생이었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환단고기의 존재를 인터넷을 통해 접하고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죠. 모 종교단체 사이트 등을 통해 환단고기네 삼성기네 하는 글들도 개인적으로 공부하고요. 하지만 대학 와서 전공으로 공부하다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었고, 최근 Xakyntos님 등의 조리있는 설명 덕분에 지금은 최소한 역사 서술이라면 주류건 비주류건 '근거'를 갖추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02:23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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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에 나온 기사대로 포스코의 정준양회장이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지식은 전공자도 감탄할 정도로 한단고기·삼성기·천부경 같은 책 내용을 꿰고 있으며, 내몽고 적봉 부근에서 출토되는 홍산문명과 우리 선조의 유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라는 내용도 있고 그밑에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작가 조정래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비롯해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 삼국사기, 환단고기, 안라국의 역사와 문화 등 아라가야에 관한 많은 역사서적을 여러 번 탐독했다는 기사가 있듯이 사회에 잘알려진 이런 분들이 어리석고 무지몽매해서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겠지요. 또한 님들이 도외시할 동아일보 논설위원 이정훈도 "고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요서(요하 서쪽) 지역에 실재했다"라고 말하면서 6년 동안 중국, 일본, 북한, 베트남 등지를 답사해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고는 2008년 7월 건국 이후 최초로 환웅, 웅녀, 단군이 들어간 특별우표를 발행한 것을 의미가 컸던 행사로 지적하면서 "배달국을 살리고 단군을 부활시키는 것이 통일을 이루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뒤 '환단고기' 등 주류 사학이 도외시하는 역사자료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도 언급하고 있기도 하지요. 님들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이런 분들이 모두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와 같이 교과서로 똑같이 배웠던 인생 선배들입니다. 님들이 환단고기가 '환상'이라고 믿으면서 배척하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상관이 없습니다. 위의 글대로 님들이 환단고기를 '경계의 대상 1호'로 여기던 말던 대기업의 총수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선택에 따라 읽는 책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환단고기』는 역사전공자들이 무시하든 말든 한국사 관계 책들 가운데 스테디셀러의 하나이며 고대사 관련 책 중에서는 부동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누구의 생각을 강요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느낌과 생각과 인생 철학대로 살면 됩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07:37 (KST)

글쎄요. 이러이러한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좋은 것이다. 라는 논리는 그다지 올바른 논리는 아닙니다. 성경책을 읽는 사람이 수십억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에 적힌 이야기가 모두 사실은 아닌 것처럼 말이죠.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이 역사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자도꽃님께서 드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역사학의 역자도 들어보지 못한 채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도 참으로 이채롭습니다. 과학의 과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책을 근거로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대기업 총수도 있고, 과학과 관련이 없는 다른 전공의 박사들도 많고, 심지어 국가 원수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사실은 아니지요. 권위에 기대는 오류라고나 할까요.
단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단지 그 사람이 대기업 총수, 거대언론의 간부, 유명 소설가라고 해서 그의 의견이 주류 학계의 역사전문가들의 의견과 맞먹게 되는 현상은 아주 기이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특히 역사학에서는 많이 일어나지요. 대기업 총수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반박을 가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도 가지지 않거나 웃기는 일로 여길 겁니다. 그런데 유독 역사에 대해서는 그런 아마추어의 태클이 진지하게 세간에 퍼져 나가죠. 저는 이런 현상이야말로 역사학을 우습게 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역사를 사랑하고 공부하고 싶다면, 먼저 역사학을 전문적으로 배운 역사학자들의 학설을 먼저 공부하세요.
재야사학의 주장이란, 기본적으로 프로파간다에 가깝기 때문에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듣기 좋습니다. 전문적인 역사학자의 학설은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내용도 어려워서 별로 알고 싶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재야사학이라는 것이 퍼져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단지 보기 좋고 왠지 위대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기분을 좋게 해준다고 해서 마약이 기호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재야사학의 주장은 심지어 저와 같은 학사 수준의 역사전공자에게도 비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형편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마약 만큼이나 위험한 것들이죠.
70여 년 전, 독일과 일본이 무엇을 믿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신다면, 감히 재야사학 같은 위험한 물건을 좋아하실 수 없을 겁니다. 재야사학이라는 물건은, 70여 년 전 일본과 독일이 했던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재야사학의 내용 대부분이 70여 년 전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카피한 것임을 아신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재야사학이 일본의 주장을 카피해다가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기만 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신다면, 자도꽃님도 그 위험성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언젠가는.--Xakynto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09:55 (KST)답변
지금 이곳에 펼쳐지는 오류가 바로 생각의 오류, 진단의 오류, 진실의 오류, 사실의 오류, 현상의 오류 등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부터 접하는 것이 학교의 교육입니다. 자꾸 재야사학의 주장을 접하고 강단사학을 접하는 것처럼 얘기하니 위와 같은 오류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또한 독일이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망을 재야사학자와 접목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자체도 위의 오류중에 하나입니다. 역사의 전문가는 오직 강단사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덕일 소장을 비롯 재야사학계를 수준 낮은 역사 소설가쯤으로 매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주류 학계의 역사전문가들 이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들의 한일이 무엇입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상고사 왜곡에 적극 참여하였고 해방후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역사가 난도질 당하는 시점에 와있어도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의 오류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들의 노력으로 동북공정의 왜곡들이 철저히 파헤쳐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오류의 하나로 보는데 과연 그말이 맞을까요? 만리장성의 기점을 갖고 동북공정의 또다시 야욕을 보이려는 중국에 주류 학계의 역사전문가들이 이번엔 어떤 노력의 모습을 보일지 자뭇 기대가 됩니다. 아무튼 누굴 탓할 이유도 없고 욕할 이유도 없습니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걷고 있는 역사에 관심자로서 각자 소신대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11:51 (KST)
학자들은 조폭이 아닙니다. 이병도가 무슨 짓을 했던, 일제시대 일제에 부역한 학자들이 있건 말건,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입니다. 이미 2세대 이상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여전히 일제의 마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귀하의 인식이야말로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한 독선입니다. 귀하의 그 주장을 입증할 근거가 있습니까?? 우리네 학자들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일제의 하수인들입니까? 정체성의 혼란이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학자들이 아니라 재야라고 자처하는 사기꾼들, 바로 그들입니다. 동북공정에 재야라는 이들이 대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동북공정의 가장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신다면 감히 그런 말은 못할 것입니다. 동북공정의 주요 논문들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강단의 공인된 주장인 것처럼 포장하여, 이렇게 형편없는 것이 한국사학계의 상황이며, 이런 형편없는 것을 근거로 중국의 역사를 침탈하려 하고 있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근거자료 : 동북아역사재단의 공식 발표 내용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에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으로 맞대응하자구요?? 불난데 가스통을 던지는 격입니다. 이런 것을 각자의 소신이라고 하시다니요. 참으로 가슴이 답답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2:06 (KST)답변
저 내용의 50% 이상만 진짜라고 쳐도 이병도의 친일은 저리가라이군요. 이병도의 친일이 '과거형'이었다면 재야사학계의 동북공정 기여는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큰 우려가 듭니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2:14 (KST)답변
자도님/ 물론 친일은 나쁜건데, 친일 행위자의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죠. 이광수, 서정주 같은 사람들의 친일 행각이야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들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이치에 닿지 않지요. 조선사 편수회가 친일단체라고는 하나, 그들의 연구를 100% 무시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이러다가 친일파로 몰리겠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2:17 (KST)답변

의견 개인적으로 위키백과는 '진실'을 담고 있다기 보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적에 대한 학계의 평가와는 별도로 사회적인 반향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을 별도로 두는 것이 어떠할까 싶습니다. 서술 관점을 바꾸면 《환단고기》 출간 이후의 반응을 언론의 보도를 출처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jtm71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0:46 (KST)답변

의견 "누구의 생각을 강요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느낌과 생각과 인생 철학대로 살면 됩니다."는 자도꽃님의 의견에 간단히 답을 달자면, 일단 저러한 진술은 삶의 지혜로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과사전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각자의 느낌과 생각과 인생 철학 대로 백과사전을 쓸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백과사전이 아니라 '잡학 블로그'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백과사전'이라는 최소한의 요건, 즉 전문가들의 지식에 근거한 내용과 사회적으로 분명히 존재하는 주장을 담자는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겠습니다. Jtm님의 말씀처럼 학계에서는 환단고기가 무시를 당하고 있지만 역사 쪽의 스테디 셀러다라는 식으로 적으면 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다고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믿어버리면 안되겠죠. 세계적 스테디 셀러 성경이나 자본론처럼 전문가들의 검토와 비판을 거친 해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자본론과 환단고기의 차이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2:09 (KST)답변

의견 Jtm71님의 의견처럼 개인적으로 위키백과는 '진실'을 담고 있다기 보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답일 듯싶습니다. 또한 위키백과의 성격에 따라 어떤 개인적인 취향을 갖던지 규칙과 원칙따라 사실에 입각하여 수정,편집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누구에게 강요할 성격도 아니고 무시,매도,폄하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학자들이 아니라 재야라고 자처하는 사기꾼들, 바로 그들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Xakyntos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 이곳 전체의 생각은 될 수 없습니다. '친일부역자나 친일행위자, 그들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이치에 닿지 않지요'라는 것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낼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강단의 역사전문가 전체를 '친일행위자나 친일부역자,친일가담자,친일매국노'로 얘기한적이 없습니다. 다만 일부 강단사학자들이 상고사날조에 적극 참여한 예라든가 동북공정의 소극적인 모습을 얘기했던 거지, 위의 내용처럼 더이상의 확대해석할 필요는 더욱 없습니다. 더구나 '재야사학자'들을 '친일행위자'로 매도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누가 한 말이고 누가 언급했던 얘기인지 명확하게 분류하여 주장을 하였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문서편집에 있어서는 규칙에 맞게 수정.편집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실'의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지 누구의 의견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소모적인 불필요한 주장은 각자 알아서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13:36 (KST)

그리고 지금까지 강단의 역사전문가 전체를 '친일행위자나 친일부역자,친일가담자,친일매국노'로 얘기한적이 없습니다.라구요?? 그렇다면 위에 귀하께서 말씀하신 이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체 주류 학계의 역사전문가들 이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들의 한일이 무엇입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상고사 왜곡에 적극 참여하였고 해방후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역사가 난도질 당하는 시점에 와있어도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의 오류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귀하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매도를 자행하신 것은 자도꽃님이 먼저였습니다. 저 역시 강단사학을 직접 배웠고, 조만간 강단사학의 범주로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역사 연구를 시작하려는 사람이지요. 결론적으로 자도꽃님께서는 저와, 저의 스승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 귀하께서 신봉하시는 재야사학자들을 욕보였죠. 하지만, 저는 적어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매도하거나 한 바는 없습니다. 자도꽃님께는 제가 제시하는 여러 근거들이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겠지만, 학자들의 논문과 저서, 1차사료 등이 과연 개인의 생각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어쨌든, 귀하께서 규칙에 맞는 문서 편집을 할 것을 다시 한 번 천명하셨으니 저로써는 감사드릴뿐입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 자도꽃님을 주목하도록 하지요. 자도꽃님께서도 저의 활동에 주목하시어서 제가 잘못된 편집을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럼 건필하세요.--Xakynto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4:14 (KST)답변
지엽적인 얘기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상고사 왜곡에 적극 참여하였고 해방후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역사가 난도질 당하는 시점에 와있어도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것은 사실에 입각한 현실을 말한 것이지 전체를 매도한 것은 아닙니다. 님이 재야사학자를 사기꾼으로 얘기한 것이 재야사학자 전체를 지칭하는 말일 수 없듯이 사실을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제발 확대해석하지 않길 바랍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옳습니다. 님을 탓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보는 시각과 걷는 방법이 다를뿐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지금같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결코 이해를 시켜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사실대로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욕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님도 민감한 반응으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예의없는 행동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도 다르고 형제도 다르지만 한민족의 핏줄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굴이 다르듯 견해의 차이일 뿐이지요. 다만 우주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하듯 다른 생각과 견해를 갖는 상대방의 존재도 인정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더이상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부디 이것만은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14:49 (KST)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고구려연구재단 같은 것도 재야사학자의 작품이었나요? 아닌 줄로 알지만.. 자도님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좋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이 아닌 것에 의존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5:28 (KST)답변
adidas(Pudmaker)님, 이곳에서 중립적인 모습이 많아 호의적인 마음으로 지지하는 분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관리자 출마를 했던 기록도 있고 여러가지 참여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얘기를 꺼냈으면 마무리를 지셔야지요. 실망입니다. 왜 '고구려연구재단'에 대한 의문만 제기해놓고 재야사학자에 대한 억울한 누명만 만들어 놓는 모습입니까? 궁금하여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온 나라의 들끓는 비난 여론 속에 요란하게 탄생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설립 2년5개월여 만인 7일 공식 해산을 선언했다','고구려연구재단 김정배 이사장은“사람들은 북방사에 대한 연구를 많이 축적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고구려연구재단 출범으로 겨우 연구가 시작됐는데 이렇게 끝을 맺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서는 “하나의 기관이 한·중 고대사 문제도 다루고, 일본의 전후 배상 문제도 하는 것이 선택과 집중이란 측면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라며 “연구보다 정책에 주안점을 둔다는 말도 들리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한“저희 연구원들은 솔직히 억울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중대한 사업이었음에도 이사장 개인의 독주로 인해 동북아라는 큰 틀을 생각하자는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반영되기 어려웠습니다. 현재 동북아재단을 준비 중인 공무원들은 우리를 마치 ‘전쟁포로’ 취급합니다. 역사 전공자인 우리들의 노하우는 묵살합니다. 왠지 저쪽에 가서도 왜곡된 소통구조가 재연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습니다.” 고구려연구재단 한 연구원의 말이다..' 전문, 비전문을 떠나서 이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자로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재야사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을 해야할 것이고 강단사학계에서도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이 기사내용으로 확대해석할 마음은 없습니다. 님들의 마음을 알고 또한 이곳을 찾는 분들의 마음도 이해하기에 더이상의 의견개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신념대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위한 역사연구에 매진하시여 자랑스런 역사가 속속 증명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키백과가 그 한몫을 담당하길 바랍니다. 紫桃꽃 2009년 5월 6일 (수) 17:50 (KST)
개인적으로 한국사 전공자도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 같은 것은 별로 연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재야사학자들의 말에도 귀기울일 점은 있겠습니다만(이를테만 화랑세기라던가) 백과사전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미실 문서에 기여할 부분이 있으면 작은 기여 부탁드립니다. adida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18:17 (KST)답변

2번 부터는 환단고기 문서와 무관한 토론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이징 님의 과열 주의도 있고 해서 일단 저의 사용자토론으로 옮겼습니다. 분위기를 흐린 점 죄송합니다. --Xakyntos (토론) 2009년 5월 6일 (수) 22:32 (KST)답변

--베이징 (토론)

'환단고기'와 '고조선력사개관'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규원사화'와 '단기고사'는 언급하고 있으나, '환단고기'에 대한 설명은 없는 듯하여, 관련된 본문의 일부 내용을 삭제 또는 변경하였습니다. '고조선력사개관'에서 '환단고기'나 그에 속한 내용이 '명확하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토론) 2009년 7월 11일 (토) 18:23 (KST)답변

북부여 관련 내용의 출처 문제

현재 북부여 관련 내용은 위키백과:삭제 토론/틀:부여왕와 같은 조치에 의해 개별 문서에서 삭제되고 《환단고기》 항목에 모두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북부여 항목에 들어 있는 개별 내용들을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그 내용이 《환단고기》에 서술된 것과도 매우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북부여 해모수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고조선 왕실의 구성원”,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붕괴시에 충성으로 제국에 봉사하였다.” 등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환단고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나머지 내용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출처를 확인하고 불명확할 경우 삭제할 필요가 있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3월 19일 (금) 19:56 (KST)답변

문서가 병합되어 분량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가 있습니다. 원문과 비교해 보고 맞지 않는 내용은 삭제하여 분량을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10년 3월 21일 (일) 01:06 (KST)답변

환빠부분에 대해서

환단고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추가 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블로그 출처이긴 한데 거기에서 객관적 사실만 가져다 썼으니 문제 없으리라고 봅니다.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환빠라 검색하면 쉽게쉽게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니 백:잡학에 해당된다고 보지 않습니다.--Leedors (토론) 2010년 4월 28일 (수) 03:15 (KST)답변

저명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는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jtm71 (토론) 2010년 4월 28일 (수) 15:05 (KST)답변
저명성 문제도 있고, 해당 내용 자체도 《환단고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환빠라는 호칭을 설명하는 부분만 정리하여 남기고 나머지는 삭제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4월 28일 (수) 17:08 (KST)답변


Xakyntos님의 상고사 편집에 대한 병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이유

Xakyntos님의 상고사 편집에 대한 병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까닭은 사학자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로 보는 주장과 거의 같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님이 언급한 예처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론이 맞는지, 진화론이 맞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환단고기여러가지 역사서가 합본되어 나왔기 때문에 진서와 위서로 나누어 주장이 다르게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 '맞선다는 표현이 틀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소수의 의견이라도 진서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기때문에 본인은 열거형 편집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로 보는 주장도 단정형의 서술이기에 많은 사학자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문성을 인정받은 학자들의 견해이니 그분들의 주장도 존중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님이 위키백과 공동체 총의를 얘기하지만 그것도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한 다수인의 횡포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문서는 대통령같은 책임자를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의견이 전체를 대변할 이유가 없는 열거형 문서여야 합니다. 그것이 위키백과가 천명하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며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라는 의지에 부합하는 편집의 태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꾸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보는 것이 독선이고 아집이라는 얘기지요. 왜 어떤 사실에 단정적으로 자신의 사관과 주의,주장을 반영해야하는지 그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발 출구없는 반복된 토론이 봉사의 마음을 갖고 이곳에서 편집에 기여하고자 하는 순수 편집자에게 얼마나 많이 지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이해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위키백과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글로벌 백과사전으로 거듭나는 일에 일조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0:43 (KST)답변

모든 이론에는 다수설과 소수설이 있습니다. 둘을 동급으로 놓는 것이야말로 사실 왜곡이 아닐까요? 게다가 xakyntos님이 다수설과 소수설에 대한 근거까지 달아놓은 상태고요. 그리고 위키백과 문서의 대부분은 편집 분쟁을 거쳐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편집분쟁이 많이 피곤한 과정인 건 사실이지만 다른 이의 편집을 '병적이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dida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4:22 (KST)답변
그리고 진화론 얘기는 xakyntos님이 아니라 제가 한건데요, 현행 교과서에서는 이제는 소수설이 된 진화론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는 자유로운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소수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존 한국사학계가 모두 다 썩었다'는 가정이 아니라 '기존 한국사학계의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가정 위에서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국사 전문가들이 아니니까요. 기존 사학계를 인정한다면, 그 안에서 다수설은 무엇이고 소수설은 무엇인지 적어주는 것이 사실에 보다 근접합니다. 사회학이나 법학에서도 정설은 무엇이고 이설은 무엇인지 구별하지 않나요? adida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4:27 (KST)답변

adidas님은 그래도 객관적인 시각이 많다는 생각에 제한된 답변을 드립니다. 물론 다수설과 소수설에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설로 소수설이 틀리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위키백과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글로벌 백과사전으로 사전식 편집이 되어야 합니다. 사전은 소수설이라고 해서 누락하거나 분량을 작게 하는 일, 혹은 개인적 감정 개입이 느껴지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편집하지는 않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유독 인정하지 않는다, 지배적이다라는 표현하는지 그게 옳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다수설과 소수설로 나누는 것으로 그쳐야지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라는 표현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지배적이다”라거나 “만들어진 신화”라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또한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원초적인 우주관(宇宙觀)이나 생사관(生死觀), 역사관(歷史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고 '동등하다'거나 '옳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의 원래 용도처럼 나열식 열거형으로 A와 B가 있는데 다수설은 A로 보고 있다라고 표현(서술)해야 올바른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중 현재 교과서는 진화론이 다수설이 아닌가요) Lexu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5:19 (KST)답변

진화론은 제가 틀렸네요^^;;; 죄송. 창조론이 소수설이죠 adida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6:16 (KST)답변
사회적 저명성의 기준에 따른 적절한 비중 하에 관점들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만, 위키백과는 단순한 권고나 가이드라인 수준이 아니라 원칙이라는 수준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립적 시각의 원칙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요구합니다. 귀하께서 아무리 부정하셔봤자 역사라는 주제에 대해서 역사학계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출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역사학계 말고 어떤 출처가 역사학계보다 더 신뢰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귀하께 질문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도대체 누가 역사학계를 사회적 저명성에 따른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위키백과에서 과연 인정될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환단고기 문서를 한 번 보십시오. 도대체 환단고기 어디에 다수설로 소수설이 틀리다라고 써 있습니까? 틀리다라는 동사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내용적으로 볼까요? 역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라고 써 있는게 전부입니다. 귀하께서 말씀해 보시지요. 역사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한다는 말이 틀렸습니까? 귀하는 그럼 역사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아니잖습니까. 역사학계라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서 위서로 본다는 명백한 사실의 서술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됩니까? 위키백과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출처에 의한 완벽하게 중립적인 사실의 서술인데요?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A)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학계(다수설)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B)하고 있다.

귀하의 말씀하신 A와 B가 있는데 다수설은 A로 보고 있다는 서술과 도대체 차이가 뭔데요? 저는 전혀 차이가 안보이는데요? 저 인용문에 써 있는 말 중에 사실이 아닌 게 단 한가지라도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귀하의 주관적인 느낌 말고는 두 서술의 차이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정리합니다. 애초에 귀하의 주관적인 느낌에 따른 말씀과 달리 비중립적인 편향성 자체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만, 더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귀하께서 환단고기를 동등하게 서술하시길 원하신다면 창조론 문서도 진화론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과학 이론으로 서술되도록 공동체에 호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부정설, 피라미드 외계인 유적설, 월면 나치설, 지구공동설 등등도 같은 수준으로 호소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동등하게 서술되어야 한다고 위키백과 공동체의 총의가 모아진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환단고기도 같은 가치를 가지게 서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위키백과의 절대 원칙이 깨지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요.--Xakynto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9:59 (KST)답변

Xakyntos님과 adidas님이 주장하는 내용에는 창조론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으로 봐서 창조론이 옳다고 보는 관점인 것같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믿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직 납득할 설명을 안되는 부분이 존재하여 진화론이 우세합니다. 그 납득할 설명이 안되는 부분은 바로 창조론을 입증해야하는 성경에서조차 설명을 못하고 있는 공룡이란 존재일 것입니다.

지질시대에서 중생대를 3기로 나눌 때 두 번째의 시기, 트라이아스기 후의 약 1억 8,000만 년 전부터 백악기 전의 약 1억 3,500만 년 전까지 4,500만 기간동안 존재했던 육상에 거대한 파충류(공룡)가 살았고, 바다에는 암모나이트가 있었던 시기에 대한 설명을 창조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과는 달리 역사학은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하는한 중립적인 자세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만 과학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대립의 하나는, 역사과학의 논리적 구조와 자연과학의 논리적 구조 사이에 차이가 존재함을 부정하는 입장과 둘 사이의 차이를 주장하는 입장의 대립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역사를 일종의 과학이란 학문으로 놓고 본다면 님과 같이 역사과학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방법적인 동일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본인과 같이 거부하는 입장의 대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인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A)이라는 고서가 발견되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진서(眞書)(B)로 보는 측과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B)로 보는 측으로 나누어 있다. 아직은 위서로 보는 측이 우세하다.(c)

아직도 차이가 못 느껴집니까? 중립적 시각의 원칙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부응하는 편집을 하는 데에도 처음부터 다르게 평가하고 있기에 주관적인 개념과 객관적인 개념, 주관적인 서술과 객관적인 서술, 즉 아집독선 그리고 주의,주장을 반영한 모습이 같다고 보는 것이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지루한 토론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19일 (화) 05:50 (KST)답변

귀하의 말씀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환단고기》를 긍정하는 사람 가운데 역사학으로 박사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사람들 몇 명을 가지고 역사학계의 의견이 나뉘어 있다고 쓸 수가 있습니까? 이덕일은 역사학계가 노론친일사관이라 주장하며 본인 스스로 학계에서 배척당한 존재라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학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저는 이덕일 말고 역사학 박사라는 사람이 《환단고기》를 긍정하는 사람을 아예 본 적조차 없습니다. 귀하께서 제 토론에서 나열하신 “윤내현, 최광식, 윤명철, 서영수, 이덕일, 우실하, 서영대, 심백강, 복기대”라는 이름들 중에 《환단고기》를 진서라고 보는 사람은 이덕일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환단고기》를 진서라고 보는 역사학자가 누구인지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그 사람들의 견해를 역사학계의 견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합리적인 근거를 대 보십시오.
그리고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데, 저나 adidas님은 창조론을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신 모양인데, 창조론이 과학이 아니다라고 써 있다니까요? 애초에 과학 자체가 아닙니다. 《환단고기》역시 마찬가집니다. 역사적 방법론으로 보면 《환단고기》는 위서가 될 수밖에 없어요. 위서가 뭔지조차 모르시니까 이런 무의미한 토론만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하다못해 위서 (문헌학) 항목이라도 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19일 (화) 09:52 (KST)답변

잘못 알고 있다니요? 님이 자꾸 창조론을 들먹이며 유사과학이라는 논리로 묶어 같은 방법, 같은 논리로 환단고기를 진서로 보는 학자들을 비정통사학으로 둔갑시켜 유사역사학이라는 말도 안되는 용어로 몰아대려는 심산이겠지요. 창조론이 있지도 않은 유사과학이 될 수 없듯이 비강단사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유사역사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강단사학 중에 다수의 강단사학과 소수의 강단사학으로 나누어질 뿐입니다. 아래의 글이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지 믿음과 신념의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믿음과 신념의 대상이지 과학적 연구 대상이 아니다. 진화론을 '믿을' 필요도 굳이 창조론을 과학으로 끌어들여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단지 진화론은 현재 과학 학계에서 인정 받고 있는 학설로서 '알면' 되는 것이고 학계 동향 따위와 관계없이 신앙인은 창조론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처럼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듯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고 신앙인이 지켜야할 자세인 것이다.” - 이런 논리는 과학과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환단고기같은 역사서는 존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계속 진위를 살펴 연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 존재하기 까닭이며 보는 시각이 다를 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는 님이 자꾸 정통론을 주장하며 부정하고 희석시키려 하지만 위에 거론된 분들외에도 아직도 많은 분들이 진서로 보고 있습니다. 님이 정통, 비정통을 따지면서 인정하지않고 무시하지만 지금 바로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수없이 나옵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위키백과에서는 존재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역사서입니다. 주관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얼마든지 서술할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역시 예상대로 출구없는 지루한 토론에 불과하여 시간만 낭비하는 것같습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19일 (화) 13:45 (KST)답변

우습군요. 하긴, 《환단고기》 같은 걸 믿을 만큼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창조론도 얼마든지 긍정할 수 있겠지요. 본인께서 직접 학계를 양분한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그렇게 양분하는 학계의 학자는 한 사람도 대지 못하고 그저 인터넷을 보라고 밖에 못하시는 걸 보니 참 헛웃음이 나옵니다. 위키백과에서 인터넷 따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귀하께서 직접 링크하시면서 존재를 부정하신 유사과학에는 이런 것도 링크되에 있더군요. 위키백과:비주류 이론 무려 지침으로의 승격도 논의중인 위키백과의 견해 가운데 하나군요.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 비주류 이론에는 당당하게 《환단고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이, 인정받지 못하는 기록이나 의사 역사학의 주장을 소개할 때에는 그와 관련이 깊은 일반적인 해석을 함께 소개하여야 합니다.
결국 귀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적어도 위키백과 내부에서는 절대 용납이 불가하다는 간단한 결론이 되겠네요. 아니면 저 비주류 이론이 지침화되는데 적극적인 반론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뭐, 귀하께서 그만하자, 무의미하다 말씀하십니다만, 저야말로 드리고 싶은 말씀일 뿐입니다. 귀하께서 아무리 여기서 말씀을 하셔봤자 위키백과의 원칙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환단고기》문서는 귀하의 말씀대로 바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럼 정말 이걸로 토론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건필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19일 (화) 16:06 (KST)답변

우습다는 말과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Xakyntos님의 주장들이 얼마나 편협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일뿐 본래 위키백과가 가지고 있는 원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반달행위에 가까운 편집태도로 순수한 편집 기여자들에게 의욕을 상실케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미리 공개한 ‘동이의 시조 복희와 한민족’이란 제목의 발제문에서 “중국인들은 일찍이 팔괘(八卦)를 그려낸 복희씨가 자기들 조상이라 받들지만 실제 복희는 동이족의 문명을 연 시조이며 그가 활동했던 부여의 발원지 또한 동이문화의 발상지”라고 말했다.
박병섭 퀸스대 교수는 ‘환단고기와 천왕-천제-상제 사관 사이의 논리적 관계’ 발제문에서 “한국사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천왕과 천제, 상제 등의 관련자료 분석을 통해 환단고기가 진서(眞書)이며 천왕-천제-상제 간의 논리적 관계 또한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강식 경주대 교수는 ‘신라 선도신모 부여 눈수 출자론’이란 제목의 발제문에서 “환단고기엔 신라의 선도신모가 눈수-동옥저에서 남하한 사실이 있다”며 “한민족의 국통이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계승된 것과 함께 고조선-북부여-신라로 계승됐다”고 밝혔다.
민영현 부산대 교수는 ‘환단고기의 철학과 사상사적 가치’ 발제문에서 “환단고기에서 무엇보다 놓칠 수 없는 하나의 일관된 의식은 상고시대 한민족의 우수성과 힘을 강조하는 다양한 논설이 포진돼 있다는 점”이라며 “한국적 세계 이해와 인간 이해의 가능성 및 문화적 자긍심, 형이상학적 수양이론 그리고 신령한 세계에 대한 본질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립도서관을 비롯하여 국회도서관이나 각 대학의 도서관에도 이미 보관도서로 상존하는 환단고기처럼 그 가치는 언젠가는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아홉분의 역사학자들이나 인용문의 교수분들은 최소한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입니다. 어떤 검증된 자격도 없이 편집에 참여하는 님같은 편집자하고는 비교 자체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느분이 역사학계가 노론친일사관이라 주장하며 본인 스스로 학계에서 배척당한 존재라고 말했다는 것에는 다수인을 점하고 있는 강단사학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님은 그런 주의,주장을 추종하는 일부이겠지요. 이런 것도 본인의 편리한 판단과 해석에 따라 무시하겠지만 결론은 이렇게밖에 생각이 안듭니다. 위의 인용은 양분하는 학계의 학자는 한 사람도 대지 못한다하여 옮겨봅니다만 책자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듯이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이미 KBS같은 공영방송에서도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여 여러번 방영했었고 일간 신문에도 보도한 내용이므로 참조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19일 (화) 23:33 (KST)답변

* 심백강 → 충남대학교 한문학과 출신, 연변대 역사학박사, 연변대 교수

  • 박병섭 → 퀸즈대 객원연구원
  • 이강식 → 경주대 경영학과 교수
  • 민영현 → 부산대 철학과 교수
참 잘도 역사학 박사시네요. 네 명 중에 2명은 역사학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학위고, 1명은 객원연구원이라는 정체불명의 신분에 전공이 뭔지 찾을 수도 없으며, 유일한 역사학 박사는 심백강 한 명 뿐인데요? 게다가 심백강은 한문학과 출신인데다, 애초에 대한민국 역사학계에 속하지 않는 외국 학자인데 말이죠. 결국 귀하께서 예로 드신 네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제대로 된 대한민국 역사학자는 없는데 말입니다? 이런 걸 상대하고 있는 제가 다 낯뜨겁네요.--Xakyntos (토론) 2013년 2월 20일 (수) 00:29 (KST)답변

낯뜨겁다니요? 오히려 이쪽에서 이런 편집 기여자도 존재하고 있구나하여 글로벌 백과로 성장하려는 위키백과에 올려져 있기에 한국의 역사학계가 잘못 끼워진 첫단추로 끊임없이 시비로 일관하는 모습이어서 한없이 치부를 들쳐내 한심하고 낯뜨거운 느낌인데요. 그래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님은 이미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으십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렇게 안호상 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수와 박사님들, 이를테면 KBS를 통해 실증한 서울대 천문학과 박 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 대일 박사와 우리말 언어 뿌리찾기 선구자 강상원(姜相源)박사, 환단고기 탄생의 역사를 제시한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환단고기 위서론에 비판하는 제주대학교 안창범 교수, '치우의 기록을 통해본 환단고기의 역사성'을 말하는 박정학 강원대 역사학 박사, 이외에도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 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 박사, 고구려 연구회의 박찬규 박사 등등 식민사관에 젖어 환단고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환단고기의 가치를 일깨우는 분들도 많습니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넬슨(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 2665~ 2140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북한 학자들도 위의 남한학자들처럼 한국고인돌이 BC 4000년 후반기에 생겨나 BC 2000년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환단고기의 가치입니다. (성삼제,고조선 사라진역사 67,70 페이지 참조)

개천절 방북단 일원으로 참여한 단군학회의 한신대 김상일 교수님의 기고글에 '간략히 요약하면 북한 학계는 규원사화,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역사박물관 벽면에 47대 단군역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화운운하며 학계 전체가 똘똘뭉쳐 규원사화, 한단고기 위서론에 입에 거품을 물면서 열을 올리는 남한학계와 대조된다 하겠습니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님이 그렇게 부인하거나 외면하고 있지만 역사학계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더구나 이곳 환단고기의 문서를 보면 짜집기식으로 편집인용된 내용들이 주의, 사관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입맞에 맞게 편집해 놓았듯이 위의 주장처럼 한꺼풀 벗겨보거나 살펴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고 눈감고 아옹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바꿔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잘못된 편집태도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코 소명으로 주장할 올바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20일 (수) 10:17 (KST)답변

* 박창범·라대일 → 천문학 박사, 해당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 논문에 대해 재반박 없음

  • 강상원 - 동양철학 박사
  • 박성수 - 근현대사 전공
  • 안창범 - 철학 또는 신학 전공
  • 박정학 -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은퇴한 뒤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 학위 취득
  • 윤재운 - 《환단고기》 옹호 발언 자체를 한 적이 없음
  • 윤용구 - 상동
  • 박찬규 - 이분은 오히려 《환단고기》를 비판하신 분
낯뜨겁지요. 낯뜨겁고 말고요. 열심히 나열해 주신 분들을 찾아보면 《환단고기》를 전혀 옹호한 적이 없는 사람이 셋이나 되고, 남은 여섯 명 중에서 4명은 역시 역사학 박사가 아니며, 나머지 두 명도 제대로된 학자라고 볼 여지는 없는데 말이죠. 박성수 박사는 근현대사 전공으로 고대사학계에서는 전혀 입김이 없는 사실상 타전공이나 마찬가지, 박정학 박사는 애초에 박사학위를 따려고 한 목적 자체가 《환단고기》 였던 사람인데요? 근거 귀하께서 뒤에 든 세 분은 아예 《환단고기》를 옹호한 적조차 없는 분들입니다. 윤재운 박사의 경우도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블로그에서 이분의 연구의 일부를 인용[7]했을 뿐, 본인이 《환단고기》를 옹호하지 않았다는 건 위 링크만 봐도 분명한데 말이죠. 귀하께서 인터넷 몇 번 검색하면서 그 내용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자명한 증거로군요.
게다가 김상일 교수의 발언도 아주 멋지게 왜곡해 놓으셨군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김상일 교수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북한의 학자에게 질문을 했으며, 북한은 《규원사화》는 믿을 수 있지만 《환단고기》는 신빙성이 없다고 명백하게 답변했거든요.

총체적으로 볼 때 현존하는 『환단고기』에 편집되어 있는 삼성기(상,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의 사서들은 그 원본 내용을 그대로 필사하여 놓은 책이라고 볼 수 없다. (중략) 그리고 『환단고기』에 인용된 조대기, 고조선비기, 대변경, 삼성밀기, 표훈천사, 진역유기의 내용도 원본을 인용한 것으로 보기 어려우며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사실'들도 력사적 사실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여러가지 점들을 놓고 본다면 현존하는 『환단고기』는 대체로 『규원사화』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단기고사』(문화본)과 일부 국내 문헌기록들, 중국 고문헌 기록들, 신채호의 학설 등을 첨부하여 태백교-단군교의 리념에 맞게 서술해놓은 책이라고 인정된다.

대부분의 력사적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당시의 력사 발전, 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서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므로 력사 연구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6년

이것이야말로 귀하의 희망사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역사학계의 실상입니다. 하여간 소위 재야사학을 한다는 사람치고 이런 기초조사도 제대로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한숨만 나오네요. 귀하께서 열심히 찾으셔봤자 저는 이미 다 본 것들이랍니다. 그리고 하나 같이 다 사실을 곡해하고 비틀어서 본인들의 입맛에 맛게 왜곡해 놓은 것들이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이런 사기 행각이나 하면서 무슨 민족의 역사를 밝힌다고 하십니까? 이런 사상누각으로 만든 것으로는 민족의 역사를 밝히긴 거녕 민족을 시궁창에 처박는 짓입니다. 그저 가련하기만 합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20일 (수) 18:09 (KST)답변

참 말도 험히 합니다. 숨겨진 본색이 들어나는 것같군요. 사기 행각이니 시궁창에 처박는 짓이니 생각들이 오물 덩어리같아 가련한 마음까지 느껴지는군요. 하기사 재야사학자들이 잊혀진 역사를 찾아 연구하는 것을 나치즘-전체주의쯤으로 비유할 정도니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이덕일.김병기.박찬규" 이책은 왜 세명의 사학자들이 공동저자였을까요? 비록 한단고기의 위서를 얘기하고 있지만 고조선에 대하여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박찬규 박사는 단국대학교에서 한국 고대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학자로 단군신화에 대한 사관이 이처럼 다릅니다. 처음부터 바탕이 달라서 고구려 벽화 속의 단군신화단군신화의 신화적 가치와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응하여 찬란했던 한민족의 상고사를 안다는 것입니다. 단국대학교 동양연구소장으로 계시는 서영수 박사님도 비록 위서로 보고 있지만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처럼 단정적인 언사는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KBS를 통하여 고대사에서 고조선의 위치와 홍산문화 연구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민족의 진정한 상고사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하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 두산백과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A)이라는 고서가 발견되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진서(眞書)(B)로 보는 측과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B)로 보는 측으로 나누어 있다. 아직은 위서로 보는 측이 우세하다.(C)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A)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학계(다수설)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B)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 이렇게 역사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래서 출구없는 반복적인 토론에 결론을 내야겠습니다. 위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결국 편집 기여자에 불과한 사람들인데 학계에서 인정하는 박사분들의 연구논문에 대해서 사기라고 폄하하지 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곡해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련하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이곳에 이미 평판이 나있는데 꽉 막힌 님에게 무엇이 아쉬워 이해시키려 하겠습니까? 이들은 같은 위서론을 주장하지만 근본부터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말도 안되는 것으로 말꼬리 잡아대니 어이없어 답변을 하는 것이지요. 이제 됐습니다. 그러므로 더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20일 (수) 22:01 (KST)답변

귀하야말로 참 꽉 막히셨습니다. 그렇게나 귀하의 소위 증거라는 것들을 낱낱이 반박해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게 이런 것을 보면 참 가련하기까지 하네요. 이 토론은 원래부터 무의미했습니다. 어차피 위키백과에서 용납되지도 않을 귀하의 아집을 넋두리처럼 읊으셨을 뿐이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귀하의 편집이 가능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죠. 위키백과의 원칙 자체가 바뀌지 않는한 귀하의 편집은 용납될 수도 없고 용납되어서도 안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이 토론을 비롯해서 귀하 혼자만 불공정한 편집이라 주장하고 있는게 현실 아닙니까? 위키백과:비주류 이론 문서를 보세요. 이건 제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위키백과의 지침 관련 내용과 토론인데, 저 말고도 《환단고기》를 비롯한 비주류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공정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분들이 수두룩 하다는 걸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죠. 애초부터 이 토론은 귀하의 넋두리만 담긴 쓸모없는 토론이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응대라도 해드리고 있기에 성립될 수 있었던 겁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21일 (목) 01:18 (KST)답변

환단고기가 필요한 이유- 고조선사에 고조선이 없다

고조선 항목을 검토하다가 놀래 자빠져버렸다. 아니 고조선이 뭐냐고 질문을 했더니, 삼국유사 기이편에 고조선이라고 한다고.. 그럼, 기원전 2,333년에서 조선의 년수 1,908년을 빼면 기원전 425년 즉 환단고기의 대부여-북부여기의 전까지로 본다고 해서 보다가 고조선내용은 전무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지 하나, 상고사는 신화다, 환단고기는 위서다. 고로 고조선은 7세기경 청동기 원시인들의 집단 사회구조다. 그리고 중국의 선진 사허 관자에 나오는 기원전 3-4세기 내용이 고조선이다. 그럼 이것은 전부 고조선후의 내용으로 환단고기의 대부여 그리고 북부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도 가이 가이 어마어마한 사실로 위만조선은 번조선을 침탈하여 먹은 위만의 위선행위를 마치 우리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라고 하는 누가하는 이야기처엄 그대로 앵무새처럼 읇고 있었다는 점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점..

필히 환단고기의 역사적인 년대표는 아니더라도, 정서로 인정받지는 못해도 우리상고사를 멋진 신화집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 이 꿈의 상상력과 폭발적인 사상과 철학, 놀라운 거발환환웅의 녹도문 창제, 이것은 세계가 놀라야할 세계최초의 문명(글자 창제)로 천부경에 나오는 녹도문은 가이 세계적인 보물로, 이는 이미 해석가지 되어 우리고대사를 설명하고 종교로서도 종은 마루로 천신강림처로 당인데 그 하늘의 뜻은 [홍익인간]이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고 염표문 등에는 그 삼대삼원삼일의 원리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 천문학은 가이 세계최고의 역법으로 환역, 희역, 칠회제신력 등이 신화처럼 펼쳐지는 이 꿈의 세계를 왜 왜 왜. 주류역사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장악해서 밀실에 버려두어야 하는가? 참으로 답답함을 급할 수 없습니다.

이에 과감하게 이러한 역사의 구간설정부터 잘못된 것을 지적하였으나, 어떠한 반응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우선 과연 한국주류학자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고조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자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 : 기원전 2,333년 - 1,908년 = 기원전 425년 그런데 이 역사는 없고 기원전 425년이후가 고조선 초기라고 하는 무슨 역사기간이 이런가? 대부여-북부여기. 대부여의 역사는 고조선의 역사로 넣어도 되지만, 우선 일연의 년수계산 1,908년을 기준으로 전부 틀린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패망, 이유는 한군현 설치년도에 맞춘 아직까지도 한사군이 한군현이 되었지만, 마한조선의 고두막한의 이야기를 전면 부정하는 역사가 고조선역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1,908년동안의 역사는 없는 채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이에 대답은 환단고기, 단서대강, 등의 고대사속에 다 들어가 있는데,

한번 그래서 정리르 해보았습니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29 (KST)답변

단군조선 학술적 부정

단군조선을 학술적으로 부정하는 것에는 핏대를 올리시는 모습은 참 형용모순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안맞으면 뱉어내는 완벽한 이중잣대 아닙니까? 최소한의 공정한 태도조차 없는 모습을 보니 귀하가 신봉하시는 종교의 앞날도 참으로 까마득할 것 같습니다.--Xakyntos (토론) 2015년 4월 11일 (토) 16:03 (KST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 "많은 사람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이다. 게다가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청동기시대 (서기전 10세기)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고조선의 실제 성립시기는 선진의 문헌인 관자의 기록에 나오는 서기전 8~7세기로 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일보)"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현 국사교과서에 "단군조선"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몰상식하고 소설을 쓰는 일 개인이, 아니다 부정한다고 그것이 "자기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안맞으면 밷어내는 완벽한 이중잣대가아니냐고 하는 것은 편향된 사고로, 도리어, 고조선이 아니고, "단군조선"이 맞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귀하가 신봉하는 종교의 앞날도 참으로 까마득할 것 같습니다"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인신공격성 멘트입니다.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나라 이름 문헌상 나타난 한국의 첫 이름은 조선(朝鮮)이다. 조선을 흔히 고조선(古朝鮮)이라고도 하나, 이는 후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잘못 알려진 것이다[1]. 《삼국사기》의 위만조선조와 고조선조가 나뉜 것으로 보아 일연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 이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은 한국 고유어에 한자를 갖다 붙인 취음어(取音語)로 보인다.

위키백과에도 [[[한국의 나라 이름]]]에 조선을 흔히 고조선이라도도 하나 이는 후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잘못 알여진 것이다. - 분명하게 근거 제시도 하였습니다. 이에 고(古)조선은 "옛 조선"이라는 말로, 옛날 [무슨] 조선인가하는 일제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조선사의 고대조선에 대한 신화 및 설화로 이야기하려고 이씨조선(일제시 구분)과 고조선으로 구별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국가의 호칭이다고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삼국사기>의 위서의 고조선이라고 한 것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위만조선의 전조선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이를 "전조선"과 "후조선"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나 이 또한 잘못된 국가의 지칭이다. 고로 국호가 둘인 경우, 이를 [단군]의 조선으로 "단군조선'으로 하자고 학계에서 공론화하여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국사교과서에도 [고조선]대신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공용국가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역사학자가 자신의 주장으로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진의 문헌인 관자의 기록(?)에 나오는 서기전 8-7세기로 봐야한다" 선진문헌이 화하족의 사서로 본다는 것자체가 문제가 있고, 자국의 사서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조선은 인정하되,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일제때 조선사편찬위원들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즉 단군조선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는 설화다. 곰탱이 설화다. 곰족과 천족의 원시부족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해서 단국천군(단군)은 무당이다하여 현재도 [[[고조선의 건국 신화|단군조선의 건국신화]] - 단군신화]라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높아서 상고치 못한다는 것과 역사서에 나온 사실을 인정치 않겠다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선에 대한 이름은 한국 고유어에 한자를 갖다 붙인 취음어로 보인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정[朝廷]하면 천군이 계신 곳, 크게는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반 국칭(나라를 칭)명사로 쓰입니다. 朝는 곳 아침(旦)을 의미하지만, 글자꼴의 모양은 十日十月로 우리말로는 '[천군]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인 한자에서는 [황제]라는 뜻으로 황제가 계신 나라로 쓰인다는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이씨왕조하면 조는 바로 임금의 조상, 가계라는 뜻이 됩니다. 대명조선(명조)는 바로 대명의 천제가 있는 나라라는 뜻이고 청조(대청조선), 만조(대만조선, 만주조선)으로 쓰이는 일반명사, 나라의 뜻으로 쓰입니다, 나라의 한문이 國이나 이 뜻은 나는 나 日이고 라는 十方網羅의 라로 태양이 온누리에 비치는 울타리, 즉 나라는 빛의 광명이 빛추이는 터로 황제(혹은 천제)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나, 일반적으로 황제칭을 할 수 없는 나라에 그 나라의 속됨, 즉 일 제후국을 표시하는 일반 나라라고 하고 한문으로는 朝鮮으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이에 단순 조선하면 상당한 혼선을 가져오므로 이씨, 왕씨 등으로 씨의 호칭이나 그 부분의 이름을 앞에 붙인다는 것이 바로 황제국은 한 글자로 그 아래 속국이나 제후국은 두글자를 쓴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에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에 의해 통치지배구조를 [마한조선] [진한조선] [번한조선]으로 천지인 삼조선으로 나뉘어 관리했다고 하는데, (이는 위서냐 아니냐가 아니고 예시입니다. 출처를 인정하지 않으시니) 이 때 바로 마한, 진한, 번한은 바로 한조선이라는 의미로 [조선]으로 한(韓)조선의 세 조선은 마한, 진한, 번한이다. 그래서 조선하지 않고 [한후-韓候]라고 중국사서 등에 적힌 것은 [조선후]가 아니고 [한후]라고 적은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조선이 있는데, 이는 원래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쓴 나라가 [조선]이다, 그것이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나라를 [조선]이라고 한다는 삼국유사 고조선에 조선의 명칭유래를 설명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 나라라고 해서 [조선]이라는 한문으로 적은 나라입니다. 기원전 2,333년이면 상고하기 어렵다, 사서가 부족하다고 하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및 위서로 간주되는 상고사 모든 부분에 단군(단국 천군, 단국 천제 천왕의 아들)이 국호를 처음으로 [조선]이라고 하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고 모든 역사서가 단군[조선]의 시원을 알리는 조선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조천[朝天]하면 뵙는다. 하늘을 뵙는다. 천제를 지낸다는 뜻으로 朝는 아침 조가 아니고 천황/천왕/천군 등 하늘에 제사권이 이는 천제장(물론 송호정의 이야기는 무당,사제들의 연합이라고 하나, 연합이 아니고 한명으로 천군하면 천제 제사권을 갖는 하늘사람 임금이다는 뜻)이다. 이에 조[朝]는 見 (뵙다)는 훈으로 뵐 조, 누구를 '천군'(天君)을, 정(廷)은 천군지소(天君之所)라고 한 바, 조정이라는 말은 천군을 뵐 수 있는 곳, 천군지소라는 의미와 크게는 [국가]를 칭한다고 '훈몽자회'의 새김편에는 나와 있습니다. 이를 한문의 능력이 아니고, 뜻(의미)에 천군, 임금이 아니고 무당이라고 하니 대무당장으로 대사제장으로 하늘에 제사지낼 권한이 있는 [천군]으로 제천 소도의 의미도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마한조선, 번한조선, 진한조선을 [한]을 빼고도 마조선, 번조선, 진조선하기도 하고 그 왕조의 이름 한조선의 韓(조선)의 아래 3국으로 마한, 변한, 진한으로 나누어 불렀다. 이 마한조선, 번한조선, 진한조선은 단군조선을 인정해야 가능한 분류로 진조선,번조선, 마조선을 각각이 조선이 되므로 아니되고, 즉 천군이라는 뜻이 되므로, 대신 한(조선)을 제후국(관리, 관경국)으로, 마한, 변한, 진한으로 한(韓)이라고 했다. 즉 단군조선의 임금 혹은 칭은 칸[韓 ㅎ한, 칸]으로 그 아래는 ㅎ한이 아닌 가한등으로 두글자로 썼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믿고 안믿고 하자 말자가 아닌, 이러한 구조로 나라칭이 구성되었다는 것. 왜 황제국은 하나의 글자로 쓰고,제후국은 두글자로 쓰인다는 것. 그런데 중국애들의 습성이고 우리는 모두 韓(삼한통일)으로 한 [조선]후 한[칸]의 후손으로 두글자 혹은 세글자로 나라칭을 하여 그 정통성이 한[韓]이다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리(고리)는 마한(마한조선), 신라는 진한(진한조선)으로, 백제는 번한(번한조선)으로 우리의 나라칭구조를 그대로 잇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도 다 황제국으로 그 연원이 깊음을 강조하고 자부심을 느꼈다는 것이 사서에 나옵니다. 이에 조선은 명에 의해 낙점을 받은 나라이름이나, 이는 앞에 [李 혹은 李氏] 조선으로 고대의 한 조선이 아닌, 일반 나라칭으로 [아침해의 선명함]으로 해석한 단군 韓 조선과는 다른 뜻으로 명의 국호에 대한 윤허를 받는 촌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조선을 [이씨]왕가 [이씨]왕조, [이씨]조선하는 것은 조선을 구분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 본을 나타내는 [이씨]의 나라로 오얏 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만약 황제국으로 이를 한 글자로 표기한다면 [朝]한다고 생각하나, 아니고, 이씨조선의 한 글자 국호는 [李]입니다. 이에 찾아낸 대한제국의 이름은 바로 [韓]입니다. 사람들이 한문의 작명을 잘 몰라서 大, 그 다음이 太입니다. [이씨]조선의 왕의 시호가 마치 태조, 고종, 순종이라고 알고 있으나, 그 시호의 칭호는 바로 대왕[大王]입니다.

개인의견이라고 하지만, 왜 단군조선이라고 정했는가에 대한 답으로, 일개 학자가 古 조선이 국호였다고 하는 것은 재팬이 왜가 아니고 일본이었다.. 그것도 기원전 660년이라고 기어코, 어떻게 하든 한국인에게 왜를 일본[일, 태양]으로 태양민족의 오리지날 韓을 일본이 더 깊고 오래되고 천세일계의 2,700년 세상에서 가장 긴 왕조다. 그 이름도 모르면서, 일본 일본하는 것이지, 우리나라 韓 [조선]은 그리 역사가 짧은 나라가 아니다. 모든 이가 문명의 시원지고 동방의 횃불이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 문명은 글로 밝힘으로 이는 글자창제국이라는 대단한 사실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글이라고 하는 한국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글자창제국 동방(오리엔탈, 아시아)로 문명의 발상지가 바로 대한, 즉 한의 전, 檀국이다. 단국의 천군이 韓인데 단제가 아니고 단군이라고 한 것은 천왕 다음의 아들나라는 천군이라 하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바로 단국(배달신시)의 후손으로 단국의 천군이라는 뜻으로 "단군'으로 칭한 것이므로, 이는 필히 고가 아니고 구분을 위한 것이라면 [단군조선]으로 학계에서도 여러차례 논의가 되어 확정한 것으로 [단군조선]으로 정한 사항입니다. 이에 반론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주류인 양 하는 것은 국사학계에 정식으로 의견을 제출하여 주류가 된 후에, [단군조선]의 명칭은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 - 송호정-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로 절대 대한민국 역사학회나 어디에서도 주류다? 정통이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전부 몰상식하고 소설이나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을 주류로 받아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시정을 촉구합니다. 주석으로라도 송호정의 모든 내용은 주류가 아니고 개인의 사견이라고 명시해야 합니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1 (KST)답변

동이의 역사는 어디가고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 "많은 사람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이다. 게다가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청동기시대 (서기전 10세기)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고조선의 실제 성립시기는 선진의 문헌인 관자의 기록에 나오는 서기전 8~7세기로 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일보)

고조선이라고 하니, 조선만 찾고 있는데, 우리는 고래로 동방, 동국, 동이라고 불리워졌기에 동방 (Oriental -문명의 시원지, 아사달) 등으로 불리워진 민족입니다. 기자는 은나라 사람이나 소호금천, 이윤 등 모두 동이사람으로 나오고 역사가 기원전 2,333년이면 요나라 시절로, 그 시절의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이입니다. 한반도나 요동에서만 볼 것이 아니고 중국대륙 전체에서 동이를 봐야하는데, 치우천왕의 탁록전투 등은 북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너무 소극적인 연구자세입니다.

이밖에 《설문해자》에 보면 철(鐵)은 흑금(黑金)이라하고 철(鐵)자의 故字(고자)를「철(銕)」라고 했다. 이를 직역하면 곧「夷(이)의 쇠(金)」이라는 뜻으로 쇠는 이(夷)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夷)는 ‘쇠붙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하여 쇠 금(鐵)의 고어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설문해자》에서는 이와는 다른 뜻으로 “오직 동이만이 대의를 따른다. 이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이는 장수한다.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다(惟 東夷從大從弓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라는 풀이가 나온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이의 이의 뜻으로 종대종궁의 大는 하나사람 ㅎ한, 하늘의 천손자손이라는 뜻이고 궁은 穹에서 보듯이 하늘의 뜻(弘)의 하늘로 하늘과 하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는 리로 현재 우리는 구이, 구리, 구려, 구환이라고 하는 역사서에 나오는 리로 인=이라고 함은 바로 환仁=夷로 인은 하늘로부터 맡다, 천하제천권과 다스림을 받은 이로 '오랑캐가 아닌, 철기시대에는 철기를 만들었고, 단순 단군조선이 아닌 단국인 배달신시의 이야기도 환웅천왕시절도 있는데, 이들의 활동은 꼭 요동에서만 찾을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동이서적과 동이의 선비들로, 진과 한의 등장으로 고조선이 붕괴되었다는 내용은 바로 단순 고조선하여 나라명찾기가 아닌 동이족의 흐름을 봐야 단군조선 (한)의 이동이 확인될 것인데, 전혀 동이는 없고 조선을 찾는 것 같습니다. 조선은 나라의 소도라고 할 수 있고. 동이의 제후국으로 은나라에서 동이족이기에 패망후 번한조선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이계는 단순 흉노와 선비가 아니므로, 고조선이라고 함은 단군조선이전의 배달신시에 대한 고찰도 있어야 합니다.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4 (KST)답변


숙신만을 고조선으로 본다는 것은 쥬신론보다 못하다.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송호정의 일관된 주장으로,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 "많은 사람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으로 알고,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기록과 상상에 의거한 몰상식이자 소설이다. 게다가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청동기시대 (서기전 10세기)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고조선의 실제 성립시기는 선진의 문헌인 관자의 기록에 나오는 서기전 8~7세기로 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신화의 영역일 뿐 역사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일보)

관자의 기록이 선진의 문헌이라고 하나, 이 숙신이 발조선으로 전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함은 고조선을 북방국가형성으로 보는 것으로, 이는 (주신)론으로 한편으로는 숙신, 읍루, 여진의 고구려, 발해의 여진(려진)으로 본다함은 이씨조선(고조선과 구분)의 형성에서 숙신(여진)이 함께 조선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으로 국가형성의 주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진과 신라의 후손이 세운 청나라도 고조선의 후예국으로 인정하자는 의견으로 먼저 금과 후금(청)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후에 숙신을 다루어야 합니다.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 =조선'으로 추정되는 바, 숙신(쥬신)론으로 물론 고조선의 한 조선으로는 볼 수 있으나, 타 상고사에 의한 내용에서는 은나라와의 관계 - 기자조선 - 번한조선의 관계가 나오므로, 동이족중에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됨.

《대쥬신제국사》는 김산호가 그린 만화로, 고조선을 가리키는 쥬신이라는 단어의 출처로도 유명하다.- 쥬신 고조선, 대쥬신제국사는 이를 소재로 만화이나, 그 가치가 없다할 수 없지만, 이는 만화일 뿐, 역사가 아니다. 쥬신론은 하나의 소수설로 다수설이 아닙니다.

숙신(肅愼)은 고대 만주(중국 동북 지방 및 러시아 연해 지방)에 살았던 퉁구스계 민족을 말한다.[1] 식신(息愼), 직신(稷愼) 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주나라 때는 숙신으로 불렸고, 한나라 때는 읍루라고 불렸다. 6세기부터 물길 및 말갈로 불렸다. 이후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17세기에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으로 이어졌다.--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6 (KST)답변

시조와 국조

"박광용은 단군 신화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조선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구전되어 오면서 수 많은 변형이 있었던 불확실한 사료로서,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하였다.[14]"

박광용의 의견은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지적을 한 것으로 신화적 사실에 근거한 사견으로 이를 고조선 역사의 일부분으로 역사적인 시점으로 보기 어렵다. 구전되어 온 것이 아닌 사실을 적은 정사를 마치 신화라고 단정함은 어리석음을 보이는 단편으로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고 정사 혹은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부정함은 개인 사견으로 이를 주류 정당한 의견으로 볼 수 없다. 삭제함이 중립적인 것으로 보임.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전혀, 역사서에 대한 해석이 안된 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사 등 모든 역사서를 부정한 것을 올바른 의견으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시조(始祖)라 함은 민족(현대적인 개념이나)의 아버지로, 국조(건국의 아버지)와는 다른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가 있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국, 단국은 신화라고 하더라도, 그 족보는 제대로 나와 있다. 단군왕검의 탄생설화라고 치부하더라도 단군신화는 천신강림신화와 천손탄강신화가 함께 있다. 이에 시조라고 하면, 환인이 시조고, 환웅이 아버지고,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 (국조)로 하고 있음에도 신화론이라고 하는 "신비주의"론을 말하나, 용어의 선택이 극히 잘못된 것이다. 시조신이라고 신화학에서 이야기하더라도 역사서에는 분명 단군이 아닌 환인으로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인 사견으로 편향된 시각의 신화역사론 창조로, 비록 신화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 역사의 정체성을 역사화한 경우가 그리스 로마 신화 역사에서 볼 수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신화다. 고로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하는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의견과 같은 의견을 현대 역사학회에서 주류로 받아들일 수 없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03:50 (KST)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부족연맹국가로 고조선을 평가하는 것은 좋으나, 단일민족이라고 하는 혹은 여러부족이 함께 한다는 천신족과 지신족의 결합국가가 단군신화라고 하더라도, 시조설화는 환웅-환인이라고 분명 족보를 말하는데 무엇을 보고 시조설화라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의 시조가 환인이고 국조가 단군이라고 하니, 아니라고 대한민국의 시조는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망극한 일이 있는데, 역사학을 전공했다고 하는 사람이 어찌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다양한 부족의 족들을 모아 단군을 "시조"로 한 설화라고 단군신화를 볼까? 국가 건국의 아버지로 국조(건국의 아버지, 나라의 아버지)라는 용어의 사용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7 (KST)답변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15] -- 이해된다와 건국했다와는 다르다. 사견으로 역사를 말함은 소설이라고 한다. 1. 아무리 환단고기, 단서대강, 규원사화 등등 모든 고대사가 '위서"라고 해도 소설을 쓸 때, 신화를 쓸 때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전혀 역사학의 기본이 안된 상태로, 신화론 창조를 위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환웅은 삼국유사에 단군의 아버지로 나오나, 환웅(桓雄)은 이병도가 말했듯이 천왕당의 천왕의 임금님칭호다. 대통령하면 이미 그 나라가 있다는 전제를 함에도 불구하고 왕검의 이름으로 족을 대신했다. 족으로 볼 경우, 환족이라고 하여야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환웅은 위서에서는 "거불단 환웅"으로 "단웅"이라고 한다. 그래서 단을 이은 단국의 천군이라고 단군이라고 역시 임금님 칭호다. 외래세력으로 환족이라고 하나, 실제는 단족으로 단족의 임금 거불단 환웅 혹은 "단웅"으로 고쳐서 말해야 하고, 이 단웅족이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이라함은 웅족으로 확인이 안된 사실을 소설화하고 있다. 천왕이 할 일이 없어, 세력결탁용으로 아이의 생산을 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려면 천신도 지신과 합일하여야 아라리가 난다는 아리랑조로 소설을 쓰는 것이 낫다. 소설을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문동석은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고조선을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로 올려 잡는 것은 민족의 기원을 올려잡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하였다.[17]" 의도가 있든 저도가 있든간에 이러한 말은 고증으로 증거가 없다. 그러니, 이것을 신화(Myth)라고 하였고, 신화의 역사화는 역사학자의 연구결과에서 평가해야지, 문동석이 민족의 기원을 올려잡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고 해도 평가는 개인 평가지 역사적인 증거가 없는 개인평론이다. 민족의 기원을 올려잡으려는 의도는 그 단군 국조가 아닌 환웅시대와 그 이전 환국(환인)으로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 모든 인정된 역사서에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국가의 기원을 올리려는 의도는 일연이 한 것이 아니고 [고기]의 내용을 적은 것으로 누군가 조작했다는 의견은 사견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사실로 확인안된 당시의 의도를 지금 민족의 기원이 겨우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의 기원을 너무 낮게 잡으려는 의도적 폄훼다. 한민족의 기원이 그리 낮다면 민족의 기원이 높은 나라로 가서 살면된다. 역사는 사실이지 용어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역사학이 아니다.--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8 (KST)답변

신화책도 제대로 읽어야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마치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대표적인 신화집 및 지리서이다. 우(禹)의 협력자 백익(伯益)의 저서라고도 전하나 이것은 가설이고, 춘추 시대부터 한대(漢代) 초기까지 걸쳐서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한 가지씩 첨가한 것인데, 남산경(南山經)에서 시작하여 해내경(海內經)으로 끝나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1] 진(晋)나라(265-420)의 곽박(郭璞)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1] 본래 《산해경》은 인문지리지로 분류되었으나, 현대 신화학의 발전과 함께 신화집의 하나로 인식되고 연구되기도 한다. 《초사》의 <천문>과 함께 중국 신화를 기록한 귀한 고전이다.[1] 고대 천문학의 개론서이라고 한다."

진나라 사람 곽박이 지었다고 하니, 겨우 기원전 4세기라고 하는 말을 갖다 붙였다. 이것은 중국 신화서적으로 고대 천문학의 개론서 및 신화학의 보고라고 하는 것이다. 산해경은 치우천왕시 자부선인이 지리서로 천문을 곁들여 놓은 것을 곽박이 편찬하여 주를 달아놓은 신화서적이다. 내용이 전혀 다른 것으로,

산해경에는 중국의 역사로서 포함되기도 하는 황제 (전설), 치우, 소호, 전욱, 고신씨, 예, 요임금, 순임금이나, 조선, 청구, 천독 등의 실제로 있었던 지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은 신화적 · 지리적 · 백과사전적인 내용들이 있다. "동쪽 끝 탕곡(湯谷)에 부상(扶桑)의 나무가 있다. 10일간 햇빛을 받는데, 9일은 하지(下枝)에 받고 1일은 상지에 받는다."(<해외동경>)란 태양에 관한 이야기이고, "서쪽에 왕모(王母)의 산이 있어… 봉황의 알을 먹고, 감로(甘露)를 마시고"(<대황동경>)란 서왕모에 대한 이야기이다.[1]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웠을 때, 풍우를 진압하기 위해서 왕녀인 발(魃)을 하계에 내려 보냈는데, 전후(戰後)에 발이 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전조(田祖)인 숙균(叔均)의 권유로, 발을 적수(赤水)의 북쪽으로 쫓았다"(<대황북경>)라고 한 것은, 한발(旱魃)이란 말의 유래를 설명한 것이다.[1] 또한 곤륜(崑崙)의 위치나 약수(弱水)의 원류(源流) 등을 설명한 점은 《우공(禹貢)》과 비슷한 지리(地理) 서적이며, 순초(荀草)가 미인이 되는 약이라는 등 많은 약초를 소개하는 것은, 후세의 《본초(本草)》(한방의 약학)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다.[1]

요임금-순임금 조선, 청구, 천독 등의 실제로 있었던 지명이 등장한다. 치우천왕(단국 제14대천왕)- 위서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출처 미기재- 즉 이 이야기는 기원전 2707년의 일을 적은 것으로, 고조선의 전신 배달신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어째서 단군조선의 이야기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산해경>의 조선천독(朝鮮天毒) 배달신시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중요한 국어학적 지식을 주고 있다. 천독은 바로 신불(神市)로 바로 산높이 뚝을 쌓아 있는 하늘독으로 독은 바로 主母로 이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신들이 사는 곳, 신불(신시)와 같다. 그래서 치우천왕을 독아비, 도깨비의 원조라고 하는 이유고, 서울 뚝섬은 바로 독섬으로 치우신사가 있던 곳이다. 이는 바로 독도와도 관련이 있는 말로 신선인 천독 도깨비가 있는 무릉도원을 독도라고 했다는 국어학적 어원의 근거를 주는 좋은 자료다. 즉 고조선의 선대 배달신시 환웅(천왕)의 신화가 펼쳐지는 신화집으로 중국내 동이족의 활약상과 당시의 꿈, 신화가 있는 책이지, 고조선 이야기가 아니다. --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39 (KST)답변

역사의 연결고리가 빠졌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역사를 아예 깡그리 어떻게 하든 기원전 7-8세기 원시부족집단으로 하려고 별 일을 다한다. 4세기 이야기로. 아니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 이야기를 하면 주나라 건설이야기에 고조선이 있나 없나를 먼저 확인하고 점프를 해도 가능한 이야기지 기자조선이라고 번한조선의 왕이 되어 기자조선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의 삼한조선으로 한 조선안에, 삼한으로 마한조선, 진한조선, 번한조선이 삼한으로 관경을 통치했다. 즉 칸은 천제장이고 직접 나라를 다스린 것은 풍백, 운사, 우사의 삼사, 이를 삼한(나라)로 나누어 관리하는 정치조직이 있었다고 삼국유사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이야기를 전부 무시하고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주나라 문왕이 "기명유신" 그 명은 바로 천명으로 유신 - 역성혁명을 하였다. 이 때 패망한 나라가 은나라(상나라)다. 이 은에 대한 이야기는 "동이족"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확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기자조선의 기자는 은나라 사람으로 은나라 패망후 그 후손이 번한조선으로 가서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번한조선의 칸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지 않을까? 기자는 동이족이라고 중국 사이트에는 전부 자세히 기록이 나와 있고, 은의 주세력을 그렇게 싫어하는 신라 금씨의 금천의 소호금천씨가 있고, 이윤(자부선인의 제자)이 있고, 기자씨가 있고.. 다 동이족, 고조선의 나라로 알고 있는데, 갑골문, 금문의 내용이 전부 동이족의 단군과 곰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문으로 쓰여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자 기자(箕子, ?~?)는 은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운둔 하였다. 상(商)이 멸망한 뒤 유민(遺民)을 데리고 북(北)으로 이거하였다. 기자(箕子)가 상(商)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다는 ‘맥수지시(麥秀之詩)’에서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기자(箕子)는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하(夏)나라 시조 우(禹) 임금이 정했다는 9 가지 정치 원칙을 전했는데, 이를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 한다. 주왕이 달기의 간교에 빠져 주지육림을 벌이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자, 낭비가 망국(亡國)의 사치로 이어진다는 상저옥배(象箸玉杯)라는 말이 남겼다. 기자(箕子)의 기(箕)는 봉해진 섬서성(산시성) 지역의 이름이다. 봉분 지역 산시성 태곡은 춘추시대 진나라가 있었던 지역으로,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리는 북방(北方) 이민족(異民族)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기자가 봉분된 산시성 태곡은 현재 태원 주변으로 전한다. 한서(漢書)에 기자가 봉분된 지역을 조선 지역으로 비정하였으나, 한(漢)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자동래설은 조선 시대 후기 몇몇 야사에서 주장되었으나, 현재에는 실제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 많다.

홍범구주는 제2대 단군 부루가 태자시절, 우임금에게 전한 오행치수 및 조선의 9주로 홍범(弘範)은 홍익으로 하늘의 이치를, 홍범(洪範)은 이 땅의 도리를 전한 것으로 이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시기, 동양의 대홍수 9년 홍수시 오행상극법으로 자부선인의 오행상생과 함께 오행삼극법으로 역법을 이용한 치수와 지세를 적은 것이다.- 물론 환단고기의 이야기. 그러나, 이 은나라는 주에게 멸하였으나, 그 은나라의 주 세력은 진한조선으로 그리고 기자는 번한조선으로 가서 각각 왕이 도었다. 고조선의 천왕은 "왕"이라고 칭하지 않고 칸[韓]으로 단씨조선을 이었으므로 단제(檀帝)로 은은 조선의 하국으로 이들 유민들을 다 받아들였다. 이게 역사지. 무슨 4세기 운운하면 기자는? 기자조선은 우리나라 역사도 아니고.. 그럼 아무것도 아니면, 무에 이렇게 열심히 갖다가 붙여 놓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주나라의 역법은 태호복희씨의 환역(桓易)- 환하면 벌써 우리나라 선조가 한 것이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가져다 64효로 절름발이 만든 역법을 공자가 경이라고 해서 역경하였다는 소설을 쓰더라도 일관성이 있어야지. 다 필요없고 중국의 종주국(???) 주나라가...주는 은을 멸하였기에, 은의 유민중 소호금천의 금씨는주나라를 역적의 나라로 친다. 각설이가 각간 아니던가? 각설이가 밥빌어먹으면서 한자를 적어주었다고 한다.

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중국에서 찾으려 한다..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난랑비 서문 (鸞郞碑 序文) 國有 玄妙之道 曰風流 국유 현묘지도 왈풍유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 삼교 접화군생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접하여 저절로 감화시킨다. 且如入則 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차여입즉 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이 비는 삼국사기 진흥왕조의 난랑이 쓴 서문으로 본문이 전하지 않아 안타까우나, 무위지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주사, 주나라 사관의 마루라고 했느냐? 가소롭다. 그게 어찌 무위자연 무위도식한다고 도라고 하느냐.. 니네집 마루바닥이라고 하여라. 얼마나 속쉬원한 한필인가.. 노자가 무슨 노자라고 주주사(주나라 사관주제에) 그것은 주주사의 마루라고 해라. 그건 종이 아니다.

유교도교불교를 아우르는 도가 우리나라에 있는데 그 연원은 선사에 상세히 나와있다. 즉 연원이 이 세종교를 다 합친 원래의 도가 바로 풍류도다. 단군시절부터 있던 천왕랑으로 선사, 선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이야기.. 무위자연? 그래 유유자적하고 신선놀이 하니 좋더냐고, 이는 선사의 이야기중 유위자선인, 즉 무위가 아니고 유위에 대한 핵심을 말씀하신 선인의 이야기를 베껴쓴 것으로, 유위는 없고 무위만 이야기하니 그건 사관이나 베껴 쓸 마루니라.. 무위는 하나로 바로 하늘이 하는 일로 천공자연 하늘의 도라..고.. 하나.

이 예는 바로 연원이 있다.. 어디에 신라전 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 고조선의 상세한 선인들, 그전의 배달신시의 선인들의 이야기가 신화집처럼 되어 내려오고 있었다를 알리는 고조선이 실재했다는 내용을 증빙하는 자료입니다. 현재는 소실되었다고 하나, 이러한 사서의 자료에서도 충분히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는 번한조선에 유입된 은나라 동이의 하나다. 그래서 번한조선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기자씨로 기자의 후손으로 전한다.--Canendo (토론) 2015년 4월 13일 (월) 18:4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