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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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고구려 | 수나라 |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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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고건무 을지문덕 강이식 양만춘 온사문 |
수 문제 수 양제 양량 왕세적 우중문 우문술 주라후 내호아 곡사정* | ||||||
| 병력 | |||||||
| 대략 30만명~40만명사이 | 300만명~400만명사이(정규군 113만 3800명) (612년) | ||||||
| 피해 규모 | |||||||
| 매우 적음 | 800,000명 이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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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은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
598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진을 멸망시키고, 장성 이북의 동, 서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으며, 마침내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에 대비하여 방어 준비를 하였다. 수 문제는 이 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 이를 꾸짖었다.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북방 요충지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수 문제는 진노하여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
수 문제는 그해 음력 6월에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주라후로 하여금 보급을 맡겨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수륙 병진책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특이한 점은 육군이 10만에 보급을 맡은 수군이 20만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주라후의 수군은 도중에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철수했다. 일각에서는 폭풍우 말고도 장산군도와 비사성 일대의 고구려 수군에 패했다고도 한다. 요서에서는 고구려의 방어로 인해 수나라군이 요동으로 진군하지 못하였다. 598년 음력 7월, 장마가 시작되었으며 전염병과 식량부족으로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요하, 요택 방어선에 말갈군1만과 고구려군 3천은 적병 10만을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이 전쟁을 두고 신채호는 본래 고구려 군의 활약을 감추기 위해 군사의 수를 100만 대군에서 30만 명으로 줄여 기록했으며,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이 아닌 오직 자연재해에 의한 패전으로 기록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제2차 고구려-수 전쟁
수 문제는 이후 고구려를 침공하지 못했다. 604년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를 죽이고 수 양제로 등극하였다. 양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대흥성 공사와 낙양성 공사를 벌이고, 대운하와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양제는 돌궐의 계민가한에게 충성을 맹세 받은 뒤인 611년, 고구려 정벌을 결정했다. 이에 엄청난 양의 세금을 거둬야 했으며, 전선을 하루종일 건조하느라 열에 서너 명이 배에 구더기가 생기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또한 온 나라의 말과 식량, 병기등의 물자를 탁군으로 옮겼다. 이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양제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다.
612년 음력 1월, 수 양제의 원정군이 탁군을 출발하였는데, 그 수가 113만 3800명이었다.[1] 또한 말 10만 필과 수송병을 합하면 그 수가 정규군의 2~3배나 되었다. 수군 또한 상륙군 4만을 포함한 10만 명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배다리를 통해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강건너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만다. 두 번째 공격에서 수나라 군은 도강에 성공하여 고구려 군 1만여 명을 죽이고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공격부대를 둘로 나누어 50만을 요동성으로, 나머지 군사를 요동 각 성으로 공격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막강한 저항으로 6개월이 지나도록 요동성을 위시한 고구려의 성 한 곳도 함락당하지 않았다. 어느날은 요동성에서만 4만이 넘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다. 고구려측도 피해가 적지 않았는데, 요동성의 군사 10만(평지성이라 다른곳보다 군사가 많다.)중 전사자 2만을 포함해서 7만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침공에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제는 요동을 포기하고 별동대를 편성해 평양성을 곧장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약속한 날짜에 평양을 공격할 수 없게 되자 수군 단독으로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왕제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군에 의해 참패하였다. 고건무는 내호아가 이끄는 군대가 비사성이 아닌 평양 장안성으로 처들어오자 서둘러 수군 2만명을 전부 상륙시켜 평양 방어군과 함께 협공하였다. 또한 수군에게 상륙 이전에 남아있는 당 수군을 섬멸하라 해서 전함의 대부분을 불태웠다. 상륙군 4만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수군도 마찬가지라서 살아돌아간 내호하의 군사는 수천밖에 되지 않았다. 이 소식에 양제는 군을 24군에서 9군으로 군대를 개편하였다. 음력 6월에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30만 5000명의 수나라 군이 평양으로 진군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 치의 양식을 등에지고 행군을 했는데, 군사들이 피로와 더위에 지쳐 군량을 버리기도 하였다. 결국 나중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평양에 닿기도 전에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또한 을지문덕이 청야 전술을 지시하여 어디에서도 식량을 찾을 수 없었다. 수나라 군중에 탈영병과 전염병자가 속출했다. 압록강 일대를 방어하던 을지문덕은 주민들을 모두 성 안으로 옮기고, 가축이나 식량을 감추었으며, 성 외에 있는 우물을 메워 적들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였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에게 거짓항복을 하여 수나라 군의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양제는 을지문덕이 진중에 들어올 경우 무조건 생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 군 진영에 들어가 수나라 군대를 엿보았다.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 의사를 표명하고 자리를 뜨려하자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유사룡이 무례한 행동이라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보내주었으나 곧 계략임을 눈치채고 사람을 보내 다시 잡으려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수나라 진중에서는 퇴각을 주장하는 우문술과 계속 진군 해야한다는 우중문 사이에 충돌이 있었으나, 총사령관인 우중문의 지시에 따라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너 진군을 계속하였다. 고구려 전군 30만 중 10만이 요동성에, 나머지 15만 정도가 다른 요동의 각 성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평양 군사는 기껏해야 수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을지문덕은 소규모의 군대를 지속적으로 수나라 군을 공격하게 하여 수나라 군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승리하게 해주었다. 승리에 도취한 우중문은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격하였다.
살수 대첩
을지문덕은 이때 우중문에게 사자를 보내 시를 한 편 보냈는데, 이 시가 바로 "여수장우중문시"이다. 또한 우문술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영양왕이 황제에게 항복을 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다. 결국 수나라 군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 淸川江)에서 물을 만나 퇴각 속도가 더디게 되었다. 고구려 군은 이를 노려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를 두고 을지문덕이 수공으로 적을 전멸 시켰다고도 한다. 이 전투를 살수 대첩이라 부른다.
이 전투에서 우문술은 자신의 부장 [[신세웅과 그가 이끄는 8군이 모두 전사하며 우문술의 전군 대부분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하며 요동으로 돌아간 적의 숫자는 2700명에 불과하여 수 양제는 이러한 전과에 큰 불만을 나타내었다. 또한 을지문덕을 놓아준 유사룡을 참수하고 수나라의 지휘관들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포함하여 대부분 패배의 책임을 물어 쇠사슬로 포박지어 압송되었지만, 유독 우문술의 부장 설세웅(薛世雄)만은 갑옷이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벗어던지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하여 면죄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이후 남은 군사에 상관없이 수나라 군은 8개월 만에 퇴각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2]
제3차 고구려-수 전쟁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끝난 지 4개월 후인 613년 3월, 수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침략함으로써 제3차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나라 군의 무기는 부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또한 요동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때 수나라 내부에선 권신 양소(楊素)의 아들로 예부상서인 양현감(楊玄感)이 양제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이밀(李密), 내호아(來護兒), 배온, 주라후(周羅候)의 아들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반란군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던 병부상서 곡사정(斛斯政)은 자신의 행동이 발각될까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수나라군 내부의 사정을 잘 알고있는 곡사정이 고구려로 가자 다급해진 수 양제는 급히 요동에서 군사를 돌렸다. 고구려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수나라군을 공격하여 수나라군 수천 명을죽이는 쾌거를 올렸다
제4차 고구려-수 전쟁
수 양제는 양현감의 난은 진압했으나 국내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수나라는 도적이 들끓고, 지방에서는 통제력이 약해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늘어났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한 징병령에도 소집에 불응하는 자가 많았다. 수나라군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을 통해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유일한 통로인 서문(西門)을 봉쇄하여 항전하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공을 잘 막아 내었으나, 국력이 심하게 소진되어 수나라와의 화친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명목적인 항복 의사를 전하고 곡사정을 묶어 양제에게 보냈다. 양제는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받아들이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수 전쟁을 끝났다.
결과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많은 국력을 소진하였고, 이것이 지방에서의 반란과 중앙 세력의 약화로 이어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 또한 흐트러진 국내 사정을 바로잡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수나라 이후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에 호의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당나라 또한 피폐해진 국내를 바로 잡아야 했기에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고,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경관(京觀)을 허문일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화 제국하의 질서를 원했던 당 태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당 태종은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보내 첩보 활동을 명령하였다. 이처럼 당나라의 침략 의도가 분명해졌음에도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영류왕의 태도와 그의 지나친 친당 정책에 반발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연개소문은 대당강경책을 주장해 고구려와 당 사이의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고, 결국 고구려-수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 만에 다시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