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당 전쟁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
| 고구려-당 전쟁 | |||||||
|---|---|---|---|---|---|---|---|
| |||||||
| 교전국 | |||||||
|
고구려 말갈 |
당나라 신라 | ||||||
| 지휘관 | |||||||
|
연개소문 양만춘 보장왕 연남건 고연수* 고혜진* 연남생* 연남산* |
당나라: 당 태종 이치 이세적 장량 장손무기 이도종 설인귀 당 고종 소정방 신라: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 ||||||
| 병력 | |||||||
| 20만여명 이상 (645년) | 30만여명 이상 (645년) | ||||||
| 피해 규모 | |||||||
| 고구려인 4만여명/말갈인 3,300명 | 알 수 없음[1] | ||||||
| |||||||
고구려-당 전쟁은 645년에서 668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하지만 격렬하게 벌어졌던 전쟁이다.
배경
당나라의 건국
수 양제(煬帝)는 고구려-수 전쟁에서 크게 패하였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저우의 별궁에서 사치스러운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국력이 피폐해져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지방의 호족들도 독립적인 정부를 세웠다. 또한 귀족 계층인 관롱 집단(關隴集團)마저 등을 돌려 수나라는 정치적인 기반마저 잃어버렸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연은 수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황태손인 양유를 황제로 잇게 했다. 또한, 자신은 수의 대승상이 되었다. 때마침 수 양제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며, 공이 컸던 둘째 아들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당 태종의 즉위
이세민은 또한 각지에서 당나라를 따르지 않는 지방의 호족 세력과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하고, 624년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형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막내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웠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파 중에는, 위징(魏徵), 왕규, 배적(裵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장군 이정(李靖), 서세적(徐世勣)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했는데,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태종은 630년 동돌궐을 제압하였다. 이에 거란과 해, 습, 실위가 당에 스스로 속하였다.
고구려의 정세
한편, 중국에서 이와같은 소용돌이가 한참일 때, 고구려는 전쟁으로 흐트러진 국내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 고조(高祖)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영류왕은 당에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고 제후국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로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행위를 감행했고, 631년에 당나라가 고구려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같은해 영류왕은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하였고,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다. 연개소문은 강경파 외교론자였으며, 이는 온건파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져 635년에는 토욕혼을, 640년에는 고창국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당나라에 대항할 세력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640년 영류왕은 세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 당의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이는 당나라에 대항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641년에 당나라는 직방랑중(주로 군사지도를 관리하는 벼슬)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염탐하는 등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점차 긴장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정변
642년 연개소문의 세력이 강해지자 여러 대인(大人)들이 왕과 상의하여 연개소문을 죽이려 하였다. 그것을 미리 안 연개소문은 자기 부(部)의 군사를 모아 거짓으로 열병(閱兵)한다면서 잔치를 베풀어 대신들을 초대한 뒤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을 죽이고 대신 왕의 조카인 장(臧)을 새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당나라의 침략야욕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받은 신라는 위기를 느끼고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재에 나선 당나라가 고구려로 사신으로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고구려를 협박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 “ |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 ” |
라고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태종은 다시 644년에 장엄(蔣儼)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그를 토굴에 가둔다. 이로써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당 태종은
| “ |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취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2]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더 늙기 전에 이를 취하려 한다. | ” |
라고 하였다.
당 태종은 장작 대감을 설치해 전선을 제조하고, 식량을 영주로 집결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많은 대신들이 수나라의 예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태종은 자신감에 충만하여 이를 강행하였다.
결국 644년 10월,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역을 성토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제1차 고구려-당 전쟁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현도성으로 향했다. 이도종에게 6만의 군사로 신성을 치게 하고, 장검에게 6만의 군사로 건안성을 치게 했다.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거기에 당 태종이 친히 거느린 6도행군 36만이 뒤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6만명과 상륙군 4만3천, 10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본대가 80만에 이르렀지만 새로운 수레의 발명으로 수송부대가 본대의 2배에서 1/4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수송부대를 합쳐서 100만에 이르는 부대였다.
영주 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또한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신성(新城)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현도성과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당나라는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후 남녀 8천 명을 죽였다.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군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이때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도종(李道宗)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645년 5월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내어야만 하였다. 요동성 내부에선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며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고구려군은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계속하여 당나라 군은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 태종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12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당군은 뒤이어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골성(烏骨城)에서 1만명을 출동시켰다. 이 지원군은 백암성 부근에서 계필하력의 부대와 싸워 계필하력은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부상을 입고 고구려 지원군은 백암성에 입성하는 전략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당군이 두려워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태종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였다.
당나라는 함락시키지 못한 신성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함락에 실패하였다. 건안성(建安城) 역시 당나라 장검부대가 와해되며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후 건안성의 병력은 당나라 장량부대를 기습해 성공하는 등 당나라군을 계속 괴롭혔다. 이때 당나라의 진영에서는 건안성(建安城) 공격을 앞두고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이세적은 건안성이나 오골성(烏骨城)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주필산 전투
이때 연개소문은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다. 대대로인 고정의는 당 태종을 경계할 것을 고연수에게 당부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간과하였다. 태종은 사자를 보내 고연수를 안심시킨 뒤, 이세적과 장손무기(長孫無忌)로 하여금 고연수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퇴각로마저 잃었으며, 3만3천의 군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때 용문 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큰 공을 세웠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 6천 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또한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개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태종은 전투가 일어난 산의 명칭을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하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이때, 남은 군사 8만이 안시성으로 들어가서 안시성의 군사가 10만이 되었다. 당 태종은 배후가 두려워 이를 함락시키기로 한다.
안시성 전투
이세적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안시성 사람들이 당군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태종이 분노하였다.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태종에게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보급로 차단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였다.
어느 날 태종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밤 중 안시성에서의 기습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안시성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군은 강하왕 이도종의 건의로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벽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양군은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당나라는 60일 동안 총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土山)을 쌓았다.[3][4]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높게 되어 밖에서는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이도종이 과의(果毅)부복애(傅伏愛)를 시켜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폭우로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토산이 무너지자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태종은 토산을 빼앗기자 진노하여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결국 이길 수 없자,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이에 태종은 이도종에게
| “ |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전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 ” |
라고 하였다.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는데,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설도 있다. 당의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로만 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645년 9월 당 태종은 요동이 추워지고, 병사들과 군마를 관리하기 힘든 것과 군량이 떨어질 것을 예측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요택으로 달아났다. 당나라 군대가 선택할 수 있는 퇴각로는 3개가 있는데, 요하 하구는 고구려 건안성이 버티고 있어 갈 수가 없다. 따라서 당나라 군대는 진흙밭인 요택을 건너는게 아닌 요하 중류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는 이 길을 가지 않았다. 이는 요동 지역의 고구려군을 의식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습지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태종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고 좋게 말했지만, 이세민 조차 나서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지(死地)를 건너고 있었다. 20일동안의 퇴각은,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 군사들의 옷이 젖고 폭풍과 눈 엄청난 추위에 동사하여 죽은 군사가 매우 많고 소,말 10마리중 일고여덟마리가 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혹자는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해 피해를 입은것을 모두 추위때문에 죽었다고 핑계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태종은 퇴각하는 길에서
| “ |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 ” |
라고 말하였다. 이때 당 태종의 퇴각에 관련하여 많은 이견이 있는데, 근대의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고자 일부러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는 최소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이 함락 당하였고, 요주·개주·암주의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에 빼앗기고 15만 명을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전마는 10에 7~8이 죽고, 전사자는 2천명, 심지어 신당서는 전사자가 천명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100만대군을 육군 6만에 수군 4만3천으로, 육군 선발대와 수군 상륙군만 기록한 구당서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피해는 훨씬 컸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수만단위의 부대를 이용해서 큰 성과들을 올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겨우 1~2천의 사상자는 너무 적은 것이다. 군사의 수준 차이가 있더라도 수나라가 평지성에 10만 군사를 가진 요동성 공격에서 20만에 이르는 군사를 잃었다는 점과 안시성이 요동성보다 공격이 어려운 산성이고 군사 수가 요동성과 비슷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못해도 30만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군이 퇴각로를 함락시킨 요동성 일대로 하지 않고, 진펄지대인 요택으로 한 점과 많은 양식을 이전에 고구려에게서 탈취하였는데, 군량미가 떨어진다는 것을 핑계로 당군이 서둘러 퇴각한 점. 그리고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왔다는 점과 자신들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은 정확히 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전쟁을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 있다.
한편, 항복한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제2차 고구려-당 전쟁
당나라는 655년과 659년 음력 11월에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음력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하였다.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나라군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그 해 음력 4월에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나라군이 패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661년 음력 8월에 당나라는 드디어 총력을 다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군은 총 44만의 대군을 6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육군으로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해로로 공격하였다.
바다를 건너온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압록강에 상륙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방어하게 하니 압록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졌다.
평양을 향해 바다로 직접 건너온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상륙하여 평양 부근의 사수에 주둔하였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과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역시 평양에 주둔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직접 출격하여 662년 방효태가 이끈 옥저도행군을 사수에서 몰살시켰다. 이 전투에서 사령관 방효태는 물론이고 그의 13명의 아들이 모두 죽었다.
역시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도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원정군의 도움을 받자마자 바로 탈출하였다.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은 전투 도중 전선을 이탈하였고, 정명진은 군중에서 돌연히 죽었다. 바다를 통해 건너와 상륙한 4개 부대는 압록강 인근에서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당 고종의 철군명령이 떨어져서 퇴각했으며, 패강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은 완전히 궤멸 되었다. 여세를 몰아 연개소문이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을 공격하자 당군은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곧장 퇴각하였다.
전쟁은 고구려가 승리했지만 그 여파는 고구려와 당 모두에게 심각했다. 우선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경제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나라는 계속된 실패로 인해 고구려를 침공할 뜻을 잃어버렸다.
제3차 고구려-당 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이적, 설필하력, 학처준, 백안륙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20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7년부터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부여성 지방 40여개의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요동의 6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668년에는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수뇌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