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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공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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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央家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5월 9일 (수) 02:15 판 (공손찬의 자)

마지막 의견: 14년 전 (威光님) - 주제: 공손찬의 자

공손찬의 자

널리 알려진 바로는 공손찬의 자가 백규(伯珪)라고 합니다.

한편 185년에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가 건립되었는데, 여기에 공손찬이 참여한 사실이 보입니다.

"탁령, 요서군 영지현 사람 공손찬 백규(伯圭), 1000전 기탁함."

공손찬이 참여한 이 비석에 따르면, 珪가 아니라 입니다.

그렇다고 당시에는 珪 대신 圭만 쓴 것일까... 하고 생각하자니, 비문에 적힌 인물들 중에는 자로 珪를 쓴 인물도 있습니다. 즉, 圭만 존재했던 것도 아닐뿐더러 공손찬 자신이 직접 圭를 쓴 것이라고 못박아둔 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응소(應劭)의 자도 이 비문에 따라 중원(仲遠)을 중원(仲瑗)으로 고쳤으며, 仲瑗의 경우 이미 학자들이 瑗이 옳다고 논거한 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역사서가 정밀하게 작성됐다 하더라도, 사서 속 당사자의 흔적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비문만큼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伯圭를 본문에 적고, 그 출전과 함께 伯珪라는 표기는 주석으로 달아놓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威光 (토론) 2011년 1월 10일 (월) 12:12 (KST)답변

-끼어들기 당초 `공손찬이 총기(聰技)가 과인(過人)하여 군장부를 모두 통독하고도 태수에게 진술함에 있어서는 틀린 바가 ㅇ벗엇다.` 또 `태수가 그를 준재로 예우하여 처지(妻之)했다.`는 범서의 언급으로 말미암으면 백규의 성질이 매우 꼼꼼하며 대요는 물론 약식까지 꿰뚫 정도의 품성이었다고 할 만하다. 관소에 임해서 자모가 매우 당당하고 상관을 섬겨 멀리 교주까지 나갈 정도면 걸어다닌 `의협`의 수준. 그도그럴 것이 북망산에 올라 선인에게 제를 지내고 역병으로 죽을 지언정 수레를 직접 끌고 유배지까지 동행하겠다고 호언했던 것과 강개함을 품고 기마(騎馬)채로 산을 내려왔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매우 절절하기까지 하다. 고인을 기탁함에 있어서 스스로 이름자를 파는데 통가자를 매번 다르게 적지 않을 것이 첫번째/장인이 명단대로 새기는데 대소(錢의 많고 적음)를 가려 우선순위를 정하여 일을 처리했을 것이 두번째/비석은 시대(時代.一平生)를 점쳐 국휘(國諱)를 꺼리고 오직 군휘(君諱)를 피할 뿐이고 사기는 일통(一統)을 내려와 각각 묘호까지 달리하는데 무엇을 어디에 비교하려 드는겐가? 未央家 2012년 5월 9일 (수) 02:12 (KST)未央家


기존에 알려진 자(伯珪)와 다른 자(伯圭)가 발견되었다면 그에 대한 관련 학자 (또는 전문가)들의 논의가 있을 듯 한데,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BIGRULE (토론) 2011년 1월 16일 (일) 02:15 (KST)답변
일단은 1차 사료(비문)가 2차 사료(삼국지)보다는 우선할 것 같습니다만, 홀이란 뜻으로는 圭와 珪가 통해서, 같은 것에 대한 다른 표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Synparaorthodox (토론) 2011년 1월 16일 (일) 11:51 (KST)답변
학자의 논의로는, 혜동(惠棟)이 공손찬전 주석에 언급한 사례가 있습니다. 또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圭와 珪가 통하긴 하지만 엄연히 선택하여 썼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유관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자로 圭가 아닌 珪를 쓴 사람이 공존합니다(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요 -_-;;). 제 생각에는 후대의 학자(진수...)가 기록을 할 때, 圭와 珪가 자의도 같은데다가 珪의 경우 과 부수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혼동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威光 (토론) 2011년 1월 16일 (일) 12:25 (KST)답변
정확성으로 판단해 본다면 Synparaorthodox님의 의견처럼 '1차 사료'가 되는 '비문'에 적혀 있는 자를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공손찬 본인이 참여했다면, 현재로서는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로 보아야겠지요. (진수 등이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공손찬에게 직접 자에 대해 문의하고 저술한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BIGRULE (토론) 2011년 1월 17일 (월) 14:05 (KST)답변
'규찬'(圭瓚, 珪瓚)이란 낱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Synparaorthodox (토론) 2011년 1월 17일 (월) 17:08 (KST)답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보니 헌제가 조조에게 珪瓚을 주었다는 기록이 무제기에 있군요. 아무래도 서진 당시에는 珪瓚이 일반적인 표현이어서, 진수가 이를 추념해 伯珪라고 적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후한서의 기록은 이걸 답습한 것이구요. 어쨌든 圭瓚이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가 신빙성을 더해준다고 생각합니다. --威光 (토론) 2011년 1월 17일 (월) 18:16 (KST)답변

제안한 바 대로 본문을 고쳤습니다. 이견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威光 (토론) 2011년 1월 19일 (수) 17:12 (KST)답변

비문 등의 글자가 100% 맞는다는 보장도 없는 것 아닌가요? (비문을 공손찬이 직접 새기지는 않았을테고요.) -- ChongDae (토론) 2011년 1월 20일 (목) 14:55 (KST)답변
그대로 그 말씀을 적용하자면, 사서가 100% 맞는다는 보장도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공손찬 사후 100여년 씩이나 지나서야 활동하던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말이지요... 게다가 삼국지 또한 공손찬이 살아돌아와서 검수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비문의 글자가 틀렸다면, 당시 공손찬이 비석을 보고 석공에게 다시 새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_-;; --威光 (토론) 2011년 1월 20일 (목) 23:0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