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하루나 (전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Lee Soon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3월 12일 (월) 20:14 판 (함명 유래)

하루나(일본어:榛名)는 일본해군의 전함으로 공고급 전함의 3번함이다.

함명 유래

하루나의 함명은 군마현에 있는 조모 삼산(上毛三山) 중 하나인 하루나 산에서 따왔다.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옛 쿠니(國)의 명칭이 아닌(전함 야마토, 무사시, 항공모함 시나노는 엄밀히 따지면 각각 고대국가, 검객, 강의 이름에서 따온게 아니라 역시 옛 쿠니의 명칭에서 따왔다.) 산악명을 쓴 이유는 이 배를 포함한 공고급은 당초 「장갑순양함」으로서 계획되었기 때문에 일등순양함의 명명관례에 따른 것이다.

건조 경위

이 배는 당초 「제2호 장갑순양함」으로 계획되었으며 1911년 4월 고베가와사키조선소(후일 가와사키 중공업)에 발주되었다. 이 배는 이제껏 주력함이 해외발주나 해군공창에서 밖에 건조되지 않았던 바, 이른바 주력함으로선 처음으로 민간조선소에 발주된 함이다. 한편 미츠비시합자회사 나가사키조선소(후일 미츠비시 중공업)에서도 「제3호 장갑순양함」(후일 키리시마)이 발주되었고 공정의 진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져서 두 회사는 심한 경쟁의식을 지니고 건조에 임하게 된다.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14년 한 비극이 일어난다. 11월 18일에 기관 계류 시운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직전에 고장이 발견되서 예정이 6일 늦춰졌다. 원래대로라면 시운전이 실시되었을 18일 아침 기관건조 최고책임자인 가와사키조선소 기공작부장 시노다 코타로가 자살한 것이다. 유서는 없었지만 계류 기관 시운전 지연의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당시의 군함건조는 그렇게 중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시노다가 죽은지 반년 후 순양전함 하루나는 자매함 키리시마와 동시에 준공, 해군 요코스카 진수부(鎭守府)에 인도되었다. 이 이후 민간조선소에서도 주력함 건조가 이뤄지게 된다.

신조시의 특징 등

메인기관에는 가와사키 조선소와 기술제휴를 맺은 존 브라운사의 브라운 커티스식 직결터빈을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이 배에만 탑재했다. 이것은 하나의 터빈에서 압력이 다른 복수의 실린더로 나눠서 출력하는 엔진으로 각각의 실린더를 추진축에 직결하여 1기당 2개의 추진축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무장 상의 특징으로는 주포에 종래의 빅커스사 제품이 아닌 국산 41식 36cm포(정확히는 14인치=35.6cm포)가 이 배부터 채용되었다. 또 부포는 양현의 갑판에서 약간 낮은 포곽에 한쪽 현 8문 계16문을 신조시에 장비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함이 주포를 서로 쏴대는 상황에선 사정거리가 짧고 사계(射界)가 좁은 소구경포가 이용될 기회가 격감하여 나중에 중량경감이나 불침대책의 명목으로 철거된다. 먼저 1932년에는 대공기총증설에 의한 중량경감으로 양현 최전방의 1,2번 부포를 철거,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2월 전후로 또 6문을 철거하여 전쟁 후반에는 각 현 4문 계8문을 남긴 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다른 공고급 전함과 마찬가지로 하루나도 신조시에 53.3cm어뢰발사관을 각 현 4문씩 계8문을 장비하였다. 이것은 좌우대칭이 아닌 약간 비낀 위치이며 흘수선 아래에 고정되어있다. 당시엔 포전거리가 짧다고 상정하여 파괴력이 뛰어난 어뢰를 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포전거리의 연장에 아울러 이 배의 발사관이 실전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 발사관에 관해선 나중에 철거되었다거나 2차 개장 이후에도 남아있었다고도 하는데 신조시에 장비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명확한 정보가 없다고 한다.

함력

1912년 3월 16일 가와사키 고베조선소에서 기공, 1913년 12월 14일 진수, 1915년 3월 19일 순양전함으로서 준공, 요코스카 진수부에 입적. 동년 12월에 제2함대 3전대로 자매함 3척과 같이 편입된다. 1916년 먼저 영국 해군에 의해 도입된 방위반 사격조준장치(단 시험작)를 일본해군에서 처음으로 탑재한다. 이것은 모든 포문이 동일목표를 공격할 때 일괄적으로 지향, 발사를 행하는 일종의 원격조종시스템이다. 이 전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로 일본도 연합국으로 참전함에 따라 이 배도 중국방면, 중국북부, 러시아방면 등에 경비활동을 하였다. 1920년 9월 20일 시베리아출병 지원을 준비하여 홋카이도 시리베시지청 근해에서 전투훈련 중 1번 포탑 안에서 유탄이 파열하는 「당중(膅中)폭발」사고가 발생, 15명의 사상자와 선체전역에 이르는 손상을 입고 수리를 위해 요코스카로 회항한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중 유틀란트 해전의 결과 원거리포전 중 수직낙하하는 적 포탄에 대해 순양전함 수평방어력의 허약함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개선할 필요가 생긴데서 이미 수리를 위해 들어와 있던 이 배도 먼저 이를 따라 방어강화와 주포사정거리연장등을 시행했다. 개장 중인 1921년에 워싱턴해군군축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배를 포함한 공고급의 대체함으로 생각하고 있던 아마기급을 건조중지하고 공고급을 근대화하여 제1선의 전력유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하여 마침 개장을 일시로 끝내고 연습함으로 현역에서 빠져있었던 이 배는 1924년에 다시 근대화 대개장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하루나는 제1차 근대개장을 처음으로 받은 함이 되었다. 이는 종래의 석탄, 중유혼소(混燒) 보일러에서 중유전소(專燒) 보일러로 바꾸고 상부구조물과 선체의 대폭근대화를 포함한 개장으로 이제까지 낮은 사령탑과 높은 망루 조합이던 함교가 나중에 일본전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중후한 "성곽형 장루(파고다 마스트)"로 바뀌는 것도 이 배가 최초였다. 또 이 개장에 의한 속력이 25노트로 저하, 이 때문에 1931년 6월 1일부로 자매함 3척과 같이 순양전함에서 전함으로 함종이 변경되었다. 또 공고급 전함 모두 혼소보일러를 전부 전소보일러로 바꿀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으로 이 배만 이 시점에서 혼소보일러를 일부 남기게 된다. 이 일련의 개장을 결과로 이 배는 일본해군에선 이례적으로 장기간인 8년간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있게 되었다. 일련의 개장을 마친 1928년 쇼와의 즉위를 기념하여 12월 4일에 거행된 대례특별 관함식에서 이 배에 일왕이 승선하였다. 덧붙여 관함식에는 메이지 이래로 참가함선이 가장 많았으며 외국의 참가함도 많았다고 한다. 1931년 11월 8일 쿠마모토 행행(行幸)에서도 일왕이 승선하였다. 만주사변에 의해 중일 간의 긴장감이 심해지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발전되가는 과정에선 하루나도 가끔씩 중국방면으로 경계활동을 나갔다. 그 다양한 정세 속에서 일찌감치 대공, 항공무장등 세세한 추가개장을 받으며 1933년 9월 해군군축조약 실효를 노리고 두번째 대규모 근대화개장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번에도 자매함들 중에선 가장 최초였다. 거진 1년에 걸친 이 제2차 근대화개장에선 동력부의 쇄신과 선체, 상부구조물의 근대화개장이 이뤄졌고 출력을 신조시의 배로 하여 속력도 30노트를 넘는 고속전함(공식분류는 어디까지나 전함이지만 이 이후의 공고급 전함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한다.)으로 다시 태어났다. 근대화개장이 가장 빨랐던 이 배는 포전거리연장에 아울러서 높아진 후부함교를 후부연돌과 인접시켰는데 그 배열(排熱)의 영향이 커서 나중에 개장된 키리시마 등에선 후부함교를 후방으로 경사지게 하여 배열을 피한 공사를 하였고 이 점이 하루나와 다른 자매함을 구분할 때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또 공고, 히에이에선 주포탑측면이 각져있는데 비해 하루나, 키리시마에선 주포탑측면에 약간 둥글게 잡힌 점도 공고급 자매함들을 구분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하루나는 두개의 연돌사이 공간이 다른 자매함보다 약간 넓은 것도 특징) 제2차 근대화개장을 마친 1934년에 사세보 진수부로 이적. 이제 대미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1941년 10월 무렵 출전준비로서 자기유도어뢰를 교란시키는 현외전로와 Bulge(피탄에 의한 침수를 막기 위해 현측 수선 아래에 잡은 돌출부)에 수밀강관(水密鋼管)충전 등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