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신한국당 | |
|---|---|
| 약자 | NKP |
| 당대표 | 김영삼 (총재) 이회창 (총재), 김영삼 (명예총재) |
| 창당일 |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 1990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 |
| 해산됨 |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 |
| 중앙 당사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7-7 (현, 대림산업 건물) |
| 이념 | 보수주의,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
| 교섭단체 | 신한국당 |
신한국당(新韓國黨, New Korea Party)은 1995년 12월 6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역사
김영삼 정부 하에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다. 1995년 12월 6일, 김영삼은 1996년 4월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5공화국과 노태우 정부의 흔적이 강한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신한국당은 민주자유당에서 민주정의당계·신민주공화당계 등의 세력을 몰아내었고, 이회창·박찬종·이재오·김문수·이우재·홍준표·맹형규·정의화 등을 영입하였다. 김영삼 정부 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은 국무총리 시절에 김영삼에 항명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고,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은 민중당 지도부 출신이었다. 이회창, 박찬종, 이재오, 이우재, 홍준표, 맹형규, 정의화 등은 각계의 스타급 인사들이었다. 신한국당은 이들 외에도 신인 인사들을 대거 내세워 42%의 현역 교체율을 기록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이후 김영삼의 당 장악력은 강화됐다.[1] [2]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새로운 피 수혈을 통해 당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신한국당은 1996년 4월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제 1당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 15대 총선거에서 신한국당은 제 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에 못 미치는 139석을 차지했다. 이후 자민련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등을 영입하면서 신한국당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김영삼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3] [4]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에 들어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은 지지율이 하락하였다.[5]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 등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신한국당 대선 후보 이회창은 김영삼의 이인제 지원설 및 김대중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 등에 반발하며 김영삼에게 탈당을 요구했다. 이인제는 15대 대선를 앞두고 치러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 뒤에도 3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해 1997년 10월 10일에 국민신당을 창당한 인물이었고,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였다.[6]
15대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 7일, 신한국당 총재 이회창과 민주당 총재 조순은 '3김 시대 청산', 'DJP연합'의 부당성 등을 주장하며 당 대 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다.[7] 같은 날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통합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했고, 이에 한나라당이 창당하였고 신한국당은 해산하였다.[8] [9] [10] 1997년 12월 3일,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IMF와 IMF 구제 금융 양해각서를 체결하였고 이는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다.[11] 이회창은 여러 악재 속에서 김영삼의 탈당·조순과의 단일화·한나라당 창당 등을 관철시켰지만 1997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하였고,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12]
역대 총선 결과
| 실시년도 | 선거 | 국회정원 | 당선자 현황 (지역구/전국구) |
득표율 |
|---|---|---|---|---|
| 1996년 | 15대 총선 | 299 (253/46) | 139 (121/18) |
함께 보기
주석
- ↑ 신영호. 보수의 재구성 시작되나:정태근發 與의원 줄탈당 가능성..신당 추진 탄력받을 듯. 투데이코리아. 2011년 12월 13일.
- ↑ 고성국. 신동아 창간 80주년 특집 ‘국민이 원하는 국회의원’ 여론조사의 함의. 신동아. 2011년 9월 26일.
- ↑ 리멤버 1996년 공천혁명. 동아일보. 2011년 6월 17일.
- ↑ 김형준. 벼랑 끝에 선 한나라당. 여성신문. 2011년 12월 9일.
- ↑ 성홍식. 대통령 친인척 비리 수사로 본 레임덕. 내일신문. 2011년 12월 16일.
- ↑ 고광본. 탁월한 리더십 불구 대권ㆍ개헌의 꿈 못 이뤄… 절반의 성공. 서울경제. 2011년 12월 13일.
- ↑ 신한국-민주당 합당 선언, 후보 이회창 총재 조순. 한겨레신문. 1997년 11월 8일.
- ↑ 창당 14주년 맞은 한나라당 충북도당. 충북인뉴스. 2011년 11월 22일.
- ↑ 김영명. 무엇을 위한 신당인가. 국민일보. 2002년 8월 12일.
- ↑ 문주용. 역대 권력투쟁의 교훈.이데일리. 2006년 8월 6일.
- ↑ 최성진. IMF 구제금융 대신 모라토리엄 선언했다면. 한겨레21. 2010년 11월 5일(834호).
- ↑ 박준형. 대한민국 정치권 역대 신당 창당 사례는?. 뉴시스. 2011년 1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