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성씨)
정씨는 대한민국의 성씨(姓氏)이다. 정씨는 鄭, 丁, 程, 3개의 성으로 나뉜다. 鄭씨는 토성과 귀화성으로 나뉜다. 토성 鄭씨는 신라계, 사성계, 호족계등 최소 3가지 계통으로 다시 나뉜다. 귀화 鄭씨도 서산, 낭야로 나뉜다. 종합하면 한국의 정씨는 최소 8가지 계통이 있다.
정나라 정 鄭
정(鄭)씨는 한국 인구 순위 5위 200만명이다. 정(鄭)씨는 중국 인구 순위 21위 1100만명이다.
한국 정(鄭)씨의 시조는 신라 6부중 하나인 본피부의 촌장 이었다고 한다. 본피부는 육촌(六村)을 육부(六部)로 바꿀 때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을 개칭한 것으로 성(姓)을 정씨(鄭氏)로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6촌 신화에 등장하는 지백호(智白虎)를 경주 정씨의 선조라 하였다. 우리나라 정씨의 70%이상은 정나라 정(鄭)자를 쓰고 있다.
경주 정씨
경주 정씨의 시조는 그의 5세손 정동충(鄭東沖)이 정씨로 사성(賜姓)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경주정씨족보(慶州鄭氏族譜)》는 모두가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는 고려 때 문과에 합격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군기시윤(軍器寺尹)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면서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경주정씨(慶州鄭氏)의 후손들은 연일(延日)·동래(東萊)·온양(溫陽)·초계(草溪)·하동(河東)·진양(晉陽)·진주(晉州) 등 120여 성씨로 분관(分貫)되었고, 경주정씨(慶州鄭氏) 본종(本宗)은 계림(鷄林)·월성(月城) 등으로 쓰여지다가 고려 때 문정공 정진후가 월성군에 봉해지면서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그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파(月城尉派)·평장공파(平章公派) 등으로 분파되었고 2,060여년 동안 78세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동래 정씨
동래 정씨는 시조(始祖)는 정회문(鄭繪文)인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을미보(乙未譜) 세록(世祿)을 보면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그 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알려졌는데, 그 묘지(墓誌)에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부터 3세(三世)만 적혀 있다.
진주 정씨
진주 정씨는 강씨(姜氏), 하씨(河氏)와 더불어 진주의 삼대토성으로, 상계을 달리하는 8파가 있다. 8명의 시조는 고려의 건국공신 정예(鄭藝), 진주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 통정첨지중추원사를 지낸 정장(鄭莊), 첨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이다.
서산 정씨
서산 정씨(瑞山鄭氏)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 때 절강(浙江) 출신 정응충(鄭應冲)으로, 송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냈다. 증손 정신보(鄭臣保)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에 올랐다가 송나라가 쇠하자, 고려에 건너와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하였다. 중시조 정인경(鄭仁卿)은 1299년, 충렬왕 25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로부터 무덕장군정동성이문관(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에 임명되었다. 정인경(鄭仁卿)은 고려에 귀국하여 상장군 판전이사사(判典理司事)가 되었고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졌다.
낭야 정씨
낭야 정씨의 시조 정선갑(鄭先甲)은 중국 산동성 제남 낭야(瑯琊) 사람으로 9의사(九義士)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배종하여 들어와 한국에 정착하였다.
나주 정씨
나주 정씨'의 시조 정해(鄭諧)는 고려 중엽 때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되었다. 나주 정씨는 경주 정씨와 계통을 달리하는 독류(獨柳)로, 정해(鄭諧)의 후손들은 나주(羅州)에 세거하면서 번연(繁衍)하게 되어 관향을 나주로 하였다.
해주 정씨
해주 정씨는 사성된 정(鄭)씨 성본으로, 경주, 낭야, 서산, 진주 정씨등과 계통을 달리하는 독류(獨柳)이다. 시조 정숙(鄭肅)은 고려 신종 때 정(鄭)씨를 사성(賜姓) 받았으며, 본래 성과 선조는 전하지 않는다. 정숙(鄭肅)의 상조는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아래 오래 세거하여, 해주을 관향으로 하였다. 정중부(鄭中夫)는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등과 협력하여 고려 의종을 폐위하여,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는데, 권력이 이고(李高)애개 독점되자 암살하였다. 정중부(鄭中夫)는 이의민을 보내 고려 의종을 암살하였으며, 아들 정균을 보내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이의방(李義方)을 암살하면서 무신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정중부(鄭中夫)는 무신정권을 독점하다가 벼슬을 물러났는데, 무신정권의 새로운 실권자 경대승(慶大升)에게 피살되었다.
연일 정씨
연일 정씨의 시조는 연일(延日)의 호장을 지낸 정의경(鄭宜卿)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조정을 장악하였는데, 권력이 이성계에게 집중되자 이성계의 반대파로 돌아섰다. 정몽주는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이 이성계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들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圭)에게 피살되었다.
하동 정씨
하동 정씨는 상계을 달리는 3성본이 있다. 첫째 계통의 시조는 정도정(鄭道正)으로, 신라 진성여왕 때 하동지방의 호족출신이다. 둘째 계통의 시조는 정응(鄭膺)으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셋째 계통의 시조는 정손위(鄭遜位)으로, 고려 5왕조에서 벼슬을 하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다. 정인지는 조선의 학자이다. 정초는 조선 세종 때 문신이다. 정운은 선조 때 무신이다. 정주영은 현대구룹의 창업자이다. 정몽준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초계 정씨
초계 정씨의 시조는 고려 초기의 학자 정배걸(鄭倍傑)으로, 상조는 전하지 않는다. 정온(鄭蘊)은 조선조에 절개가 높았다고 한다. 정엽(鄭曄)은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온양 정씨
온양 정씨의 시조 정보천(鄭普天)은 고려 중엽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선대는 전하지 않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에게 명하여 탕정군(湯井郡, 온양)에 성을 쌓을 때 정보천(鄭普天)의 선대가 성공적으로 성을 축조한 공으로 온양의 호장(戶長)에 맡게 되었다고 한다.
봉화 정씨
봉화 정씨의 시조는 고려 때 정의대부(正議大夫) 호부령(戶部令)을 지낸 정공미(鄭公美)이다. 5세손 정도전(鄭道傳)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봉해졌다. 1391년에 정도전은 우군도총제가 되었고,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어 군대를 장악하였다.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자, 정도전은 7월17일에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고,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정도전은 신덕왕후의 소생의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하려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피살되었다.
청주 정씨
청주 정씨의 시조는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毅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6세손 정책(鄭?)은 고려 충숙왕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고,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주군에 봉해졌다.
고무래 정 丁
정(丁)씨는 한국 인구 순위 36위 18만명이다. 정(丁)씨는 중국 인구 순위 48위 500만명이다.
정(丁)씨는 중국 제나라 제후 강태공에 연원을 두는 성씨로, 제나라에서 계출된 노(盧), 구(邱), 여(呂)씨의 형제 성씨이며, 강(姜)씨의 분성이다.
압해 정씨
압해 정씨 시조는 중국 당나라 사람 정덕성(丁德盛)이다. 당나라 문종때 승상을 지냈고 무종 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으며 선종 때 군국사(軍國事)로 바른 말을 간언하다, 853년 전남 압해도에 유배되어 와서 사면되었으나,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한국 정씨(丁氏)의 시조가 되었다. 정약용은 조선의 학자이다. 정세균은 국회의원이다.
헤아릴 정 程
정(程)씨는 한국 인구 순위 75위 3만명이다. 정(程)씨는 중국 인구 순위 32위 800만명이다.
정(程)씨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인물로는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 정이 형제가 있다.
하남 정씨
하남 정씨의 시조는 중국 원나라 때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을 배종하여 한국에 들어온 정사조(程思祖)이다. 정사조는 송나라 때 유학을 진흥시킨 정이의 14세손이다. 하남은 정사조의 선계인 정호(程顥), 정이 형제의 중국 본관이다.
한산 정씨
한산 정씨는 시조는 조선 시대 참봉 정회(程淮)이다. 한산 정씨는 하남 정씨의 분파로, 하남 정씨 한산군파로 부르다가, 한산 정씨로 분파하였다.
관련 기록
- 정남진(鄭南晉)은 고려 우왕 7년(1381) 안동병마사로 있을 때, 임하현(臨河縣)으로 침입한 왜구을 격파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에는 왕명에 따라 삼척(三陟)에 있던 고려 공양왕(恭讓王)과 두 아들을 참수하였다. 정남진은 명나라에 가서 물화를 교역하고 호송진무(護送鎭撫)와 싸운 일로, 장지화(張至和)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조선 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태조는 죄를 묻지 않았다. 이후 유후사부유후(留候司부留候)를 역임하고, 1401년(태종 1)에 판원주목사(判原州牧事)에 제수되었다. 태종 8년(1408)에는 민무구(閔無咎)와 내통하여 탄핵받았으나, 조선 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태종은 죄를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