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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정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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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e2005 (토론 | 기여)님의 2010년 5월 1일 (토) 08:34 판 (개요)

정탁(鄭琢, 1526년 ~ 1605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정, 호는 약포, 본관은 청주이다.

개요

이황의 제자로 명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선조 때 교리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로 모시었으며 명나라 송응창을 영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몸소 전쟁터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가 연로함을 이유로 만류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를 거쳐 3등 호종 공신으로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서는 물론 천문·지리·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저서로 《악포집》, 《용만견문록》 등이 있다.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본적은 서원(西原)이니 고려시대에 대장군인 정의(鄭顗)가 절개(節介)로 필현보(畢玄甫)의 난에서 죽었다. 그 뒤에 계신 분이 정오(鄭䫨)이고, 사도(司徒)요 서원백(西原伯)인데 돌아가시어 장사를 안동(安東)에서 지내니 드디어 영남 사람이 되었으며 여러 대가 불진(不振)하였다. 증조는 정원로(鄭元老)인데 장수현감이요, 할아버지는 정교(鄭僑)인데 생원(生員)이요,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인데 모두 숨은 덕으로 빛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뒤에 공의 귀(貴)로 증조는 이조판서를 증직(贈職)하고, 할아버지는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아버지는 순충보조공신 의정부영의정 청성부원군(純忠輔祚功臣議政府領議政淸城府院君)에 증직하고 봉군(封君)하였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증직하니 한씨(韓氏)요 진사인 한종걸(韓終傑)의 따님이다. 부인은 거제반씨(巨濟潘氏)로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정윤저(鄭允著)인데 집의(執義)를 증직하고, 다음은 정윤위(鄭允偉)인데 주부(主簿)를 증직하였으며, 다음은 정윤목(鄭允穆)인데 찰방이다.

이 가운데 정윤목(1629~1671)은 매우 총명하며 경서와 역사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뛰어난 문장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탄복했다. 학문이 예절•음악•병법•형법•음양•달력,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글씨•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는 당시 제1인자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세자 광해군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할 때 세자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 삼강리의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1589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 그곳 수양사(首陽祠)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큰 글씨를 베껴 써와 현판에 게시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도정서원(道正書院) 학파 : 퇴계 학파

정탁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표상이 있고 천품의 자질이 도덕에 가까웠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시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 방법을 들었고 참되게 알고 실천하는 데 공효로 하였다. 정탁이 가정에 있으나 조정에 있을 때나 승법(繩法)과 약례(約禮)에 한결같이 따르고 관후(寬厚)와 인서(仁恕)로 덕을 삼고 사람을 사랑하며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일을 논함에 대체(大體)를 인용하고 명분을 중하게 여겼으며 계획을 세워 아뢴 것이 다 원대한 규모와 획책이다. 의논을 무겁게 여기고 사무에 벽지(辟至)하며 측달(惻怛)하며 자상(慈詳)하여 반드시 가급적 살리는 길을 구하고 사람들이 죄와 허물에 빠진 자도 비록 소원하고 취향이 달라도 오직 약포공(藥圃公)이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하였다.

정탁께서 『중용』과 『대학』을 즐거이 읽으셨고 오로지 묵송하기를 불철하였으며 천문과 지리와 상수와 병가에 이르기까지 넓게 달통하였다. 유총병(劉摠兵)인 정(綎)의 막중(幕中)에 호상공(胡相公)인 환(煥)이라 하는 자가 있으니 유총병(劉總兵)의 스승의 처지라 정탁이 서신을 주어 왜의 실정과 왜적 방어에 대책을 논함에 아래위로 치달은 수천의 말씀과 저들과 우리들의 장단점과 강약과 이해와 승패의 형태를 요연(瞭然)하게 손바닥을 보는 것같이 하였다.

그의 재조가 완전하고 용사(用事)에 주밀(周密)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정탁이 처음에 유술(儒術)로 진출하여 중간에 화란을 겪고 말 굴레와 궁창에 피곤(疲困)하였고, 늦게는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또 퇴직을 고했으니 비록 크게 포부를 펴서 중흥의 열정을 좌우하는 데는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너그럽고 어질고 넓게 사랑하고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너그러이 옛 대신의 풍화가 있었도다. 『서전(書傳)』에 이르되, 한 개절(介節)한 신하가 있음이여 끊고 베듯한 딴 기술은 없으나 그 마음이 아름다워 관용이 있는 것 같아 남의 기술이 있음을 자기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능히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호한다고 하였으니 정탁과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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