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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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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平和統一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3월 22일 (토) 09:35 판
한반도가 분단된 모습. 38선을 기준으로 소련이 점령한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고 미국이 점령한 남쪽은 대한민국이 설립되었다.

한반도 분단(한국 한자: 韓半島 分斷, 문화어: 조선반도 분단(한국 한자: 朝鮮半島 分斷))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군정기를 거쳐 한반도에 두 개의 통치 기구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사건이다.[1] 대한민국에서는 남북 분단(한국 한자: 南北 分斷)이라고도 한다.[2] 이 문서에서는 한반도에서 '분단'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 배경과 분단 이후 현재까지의 모든 정치적 상황(한국 전쟁 포함)을 포괄하여 기술하기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당시 일본열도가 분단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단된 사항 및 원래 한반도 아닌 일본열도가 되었어야 하던 분단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당시 일본열도가 분단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단된 사항에 대한 개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의 전쟁범죄국 독일은 그 대가 및 죄값으로 동서로 분단이 되는 불이익을 당하였지만 당시 이에 대한 양대산맥을 이루던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영토의 일부이다가 독립한 한국이 억울하게 남북으로 분단되었는 데 한국은 1개의 국가로 돠어 있고 일본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특히 일본열도의 중앙에 위치한 도쿄는 남도쿄 및 북도쿄로 분단되어 아시아의 베를린이 되어야 되었다.

이에 따라 38도선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그어져서 일본이 대한민국과 같은 남일본 및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과 같은 북일본으로 분단되고 이들 사이에 한국전쟁과 같은 일본전쟁을 대신 치르고 해당 일본전쟁은 휴전 상태에 있어야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 = 세계 최대 전쟁범죄국으로 분단, 일본 = 세계 최대 전쟁범죄국이지만 국가는 그대로 유지, 한반도 = 세계 최대 전쟁범죄국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분단 등의 역사가 흘러간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특히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대 승전국들로서 소련과 미국이 자국의 국익에 따라 행동해서 그러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대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에 대한 벌로서 분단되었어야 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한반도는 틀림없이 소련이 모두 차지하여 아직까지 한반도 전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중에 들어오고 북일본에는 제2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어 한일양국 모두 잘 나가지 못하던 흑역사를 맞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 후 독일이 분단되었다가 통일이 되던 이유

먼저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4대 승전국들이 1945년 5월 9일 당시 독일영토를 당시 분할 점령하여 해당 점령지들을 이 4개국들이 다스리다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개국들은 자국들이 독일영토에 둔 점령지들을 1949년 5월 24일에 통합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소련은 자국국이 독일영토에 둔 점령지를 이에 합류하지 않고 1949년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이러니 당시 소련도 독일민주공화국을 별도로 건국하지 않고 독일연방공화국의 건국에 합류하였다면 독일은 분단이 되지 않을 수 있던 것으로 당시 자유진영에서는 이에 대하여 "항상 소련이 말썽이다"고 이 경우 발생하지 않았을 독일분단을 발생시키던 사실을 비난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소련에 의하여 분단된 독일은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장벽붕괴 및 1989년 12월 2일 및 3일 당시 열린 몰타회담에서 냉전종식을 거쳐서 1990년 10월 3일 당시 독일민주공화국이 멸망 후 인구와 영역을 모두 통째로 독일연방공화국에 내주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면서 독일통일이 이루어진다.

앞서 설명한 데로 독일은 소련이 독일민주공화국을 건국하지 않았거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들과 소련 중 어느 한쪽만 자국 영토에 진입한 상태에서 항복하였다면 분단되던 것을 모면할수 있었다.

이에 따라 독일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하였다가 패전한 것에 대한 업보나 죄값 등이 아니라 세계 최대의 해당 전쟁을 발발하였다가 패전 후 자국의 점령국들이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들이 자국의 국익에 따라 움직여서 그렇게 되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당시 일본열도가 분단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단된 이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유럽에서는 최대 패전국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대 승전국들이 독일 영토를 점령하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최대 패전국 일본이 그렇지 않았고 일본에서 독립하던 한반도가 대신 분단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당시 일본열도가 분단되지 않던 이유이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당시 미국에 항복할 무렵 소련은 아직 만주 및 한반도 북부만 점령하였고 일본 영토에는 전혀 진군하지 않은 상태로서 미국은 자국에만 항복한 일본의 영토를 일부 특히 도쿄 이북 북일본을 소련에 내줄 이유가 없어서 일본은 운좋게 분단을 모면하였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당시 한반도가 분단되던 이유이다.

한반도에는 이미 1945년 8월 9일 당시 소련군이 진군하여 점령해가고 있었고 이러다가는 자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신생 친미국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 건국하여 자국에 국익을 가져오려던 미국의 계획은 빗나가므로 미국이 1945년 8월 10일 당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각각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안 후 소련이 수락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승전국 소련과 미국은 자국의 국익에 따라 한반도를 분단시켜서 각각 자국에 국익을 주는 신생국들을 건국하던 것이다.


전자와 관련해서 일본이 훨씬 늦게 항복하였으면 소련이 일본 영토로도 진군하여 도쿄 이북 북일본이 아니어도 소련이 점령한 일본영토와 미국이 점령한 일본영토로 분단되었고 후자와 관련해서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하거나 미국이 해당 제안을 하지 않았으면 소련이 미국 대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으면 한국전쟁은 없었어도 한반도 전체가 백두혈통의 소유로 되었다.

원래 한반도 분단 아닌 일본열도 분단이 되었어야 하던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최대 패전국 일본은 독일처럼 분단되어서 세계 최대 전쟁범죄에 대한 죄값을 치르어야 되었다.

이렇게 되었으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열도 대신 분단된 한반도에서 발생하던 분단이 원래 발생하였어야하던 일본열도에서 분단으로 발생해야 하던 것이다.

그 결과 무엇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전쟁범죄국으로 저지른 세계 최대의 전쟁범죄에 대한 죄값을 자국이 치르어서 고통받아야 하던 것인데 엉뚱한 한반도가 이 고통들을 대거 받게 되었다.

하지만 神은 존재하지 않거나 정의의 편에 서지 않아서 이렇게 잘못된 역사가 흘러가게 하여 한반도 분단은 神의 존재를 증명할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신학에 있어서 연구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神이 실존하여 정의의 편에 선다면 세계 최대의 전쟁범죄국 일본이 독일처럼 분단되고 일본전쟁까지 치르어서 여러 고통을 당하면서 살도록 당시 인간들의 세계를 조정해야 되었는 데 엉뚱한 한반도에 그 역사가 흘러가게 해서 존재성 결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배경

한반도 분단과 조선총독부

일본 제국은 미국에 의해 두 개의 원자폭탄을 폭격당하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때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미 8월 13일함경북도 청진시까지 내려와 일본 제국청진 전투를 벌여[3] 8월 15일에 청진 시를 점령했다. 이 날 미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련군이 남진하자 미국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고,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자 소련은 곧바로 8월 21일강원도 원산을 거쳐 8월 24일평양을 점령했다. 그런데 군사적 분계선으로 합의한 삼팔선을 소련은 일방적으로 1945년 8월26일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남북 분단을 초래하였다.

그 후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여 9일부터 삼팔선 이남을 관할하기 시작하였다.[4] (→한국의 군정기) 한편, 경성 중앙청에서는 조선총독부소련군경성을 점령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된다는 우려로 인해 여운형에게 총독부를 맡기게 했는데 사실 이는 여운형에게 일본의 안전보장과 뒷일을 맡기게 한 것이다.[5] 하지만, 오히려 여운형8월 16일에 오전 9시에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웠다. 한편, 같은 시간 저녁 때쯤 청진 전투가 끝났고 소련이 결국 함경북도 청진시를 점령하였다. 이어 8월 18일소련이 청진시의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시켰고 그 속엔 정상진도 끼어있었다. 그런데, 8월 20일이 넘어도 소비에트 연방이 오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미국이 남한에 오기 전에 '조선인들이 일본을 괴롭히고 있고, 소련편을 든다'고 거짓정보를 알리자 이에 미국은 남한을 미워하면서 통제된 상태를 원하게 되었다[6]. 게다가, 3년 군정을 다 한 후, 미국애치슨 선언을 실시했는데 이는 대한민국이 제외된 방위선이였지만, 미국한국 전쟁에서 국제 연합군으로 참여함으로써 적화통일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국 전쟁미국남조선을 부추겨서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이 다른 국가를 강제로 전쟁에 참가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을 괴롭혔다는 거짓 뉴스를 주장하기도 했다.[7]

자주적 독립운동의 실패

1944년 8월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건국동맹을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일본이 패망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미군이 주둔하기 전에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자 서둘러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당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고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중도 좌파인 허헌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 요인이 참여하지 않은 점과 건국준비위원회 단계에서 대다수 우익 인사들이 참여를 철회한 점 등의 약점이 있었다.[4]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남북을 통틀어 군·면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를 갖추고 한민족의 자주적 노력에 의한 독립 국가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45년 11월이 되자 13개 면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적인 치안을 확보하였다.[8]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실현하려한 노력은 미국과 소련의 이해 관계에 의해 실패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친미적인 우익인사를 중심으로 한 정권의 수립을 위해 한국민주당의 인사들과 긴밀하게 연락하였다.[4] 한편, 38선 이북에서 소련은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는 않았으나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적 조직으로 재편하고 친 소련 성향의 김일성을 지도자로서 부각시켰다.[8]

미·소 공위의 결렬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문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에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하고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최장 5년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9]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극심한 이념 갈등을 빚게 되었다. 한편,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했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운동이 일어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진보주의 역사관을 가진 이은은 본 교서의 뜻을 왜곡한 것이라고 한다.[10]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이 결렬되었으며 한반도는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형국을 맞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해산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남북의 분단은 가속화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가결하였다. 그러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결의안을 허용하였다.[11]

분단

남북 정부의 수립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증대를 우선한 것은 냉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시 여론은 좌우 합작을 통한 중도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북측은 소련군정이 1945년 8월 26일~28일 삼팔선을 봉쇄하면서부터 공산화를 진행하여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주권기관으로 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모두 마쳤다. 이에 남측에서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하자 중도 정치 세력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은 결렬되었다.[12] 한편 일본 패망이 보일 때 뒤늦게 연합국에 합류한 소련은 이미 스탈린의 계획하에 1945년 10월10일 '조선공산당북조선 분국'을 설치하고, 친소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임명했다. 그리고 해방후 6개월만인 1946년 2월 16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설립하여 북측을 공산화 시켰다.

1947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었고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의결되자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 정치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국독립당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등은 남북의 모든 정치세력이 평양에 모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다. 김일성은 이 대회를 이북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장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며 이후 김구는 5·10 단독 선거에 불참하면서 통일 국가의 수립을 역설하였으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13]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일제에서 해방을 알렸으나 9월 9일에는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인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갈등의 격화

전쟁

  • 남북의 대립과 냉전
남과 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 남북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었다. 이승만국가보안법을 통하여 좌익 정치세력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14] 한편, 북에서는 한 때 좌우합작에 주도적이었던 중도 우파인 조만식이 가택 연금을 당하는 등 우익 정치세력에 대한 억압이 있었고[15], 김일성은 1949년부터 지속적으로 남침 의사를 소련에 타진하였다. 이러한 남북 갈등의 고조는 무력 분쟁으로도 이어져 1949년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소련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걸 요구함으로써 미국소련은 한반도에서 물러났는데 김일성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였고 소련 무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에 들어오게 하였고 중공군도 전쟁에 포함시켰다.[출처 필요]
1949년 초까지만 해도 소련은 미군의 한국 개입 등을 이유로 전쟁 개시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고 소련 역시 핵개발에 성공하게 되자 전쟁 개시에 찬성하게 된다.[16] 한편, 미국은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며 미군을 철수하면서도 한반도에 만약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한국전쟁은 소련과 미국이 각자 한반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벌어진 전쟁이었다.[17]
  • 6.25 전쟁 (한국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조선인민군의 대대적인 남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하였던 국군은 3일만에 서울을 내주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정면 공격을 통해 승리하였지만 유엔군으로 인해 완전한 침략에 실패하였다. 한편,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연합군)의 개입으로 전세를 역전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18]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19] 인천 상륙 작전 이후 9월 27일서울을 수복하였다. 이후 미군과 국군과 북진을 결행하였고 10월 1일에 국군이 제일 먼저 북진을 하였고, 10월 7일에 드디어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미 10월 9일에 주요적인 정부, 단체, 기관, 부대, 수뇌부 등을 평양에서 철수시킨 뒤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주요적인 정부, 기관, 등을 그 쪽으로 철수시켰다. 10월 12일에 김일성 역시 평양에서 철수하여 덕천에 잠시 머물렀다가, 10월 19일대한민국평양을 점령한 날에 덕천에서 철수하였고, 희천을 거쳐 강계까지 간 다음에 중국의 펑더화이를 만났다. 한편, 국군과 미국은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10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이 300만의 대군과 함께 개입하자, 국군과 미군은 다시 후퇴하였으며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달 뒤인 1월 4일엔 서울을 다시 내주었지만 3월 15일서울을 되찾았다. 또한, 1951년 이후 휴전 때까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교전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여 분단이 고착되었다.[20]

군사분계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도(1953년~)

6.25 전쟁의 휴전과 함께 휴전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놓이게 되었다. 그 위치는 대략의 차이는 있으나 전쟁 이전의 삼팔선을 중심으로 동서에 걸쳐 놓이게 되었으며 동으로는 강원도 고성군에서부터 서로는 임진강에 이른다. 군사분계선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21]

같이 보기

각주

  1. 용어의 출처 - 김계동,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ISBN 89-521-0205-3
  2. 계명대학교출판부, 한국 역사의 이해, 2005, ISBN 89-7585-068-4, 233쪽
  3. “8월 13일 소련군 한반도서 일본군 패배 결정적 역할한 청진상륙작전 실시”. 2015년 1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1월 14일에 확인함. 
  4.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89-8341-057-4, 567-571쪽
  5. 또다른 6.25전쟁2017. 2. 21.
  6. KBS 광복절 특집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 2014.9.3
  7. Д/ф 유엔은 미국의 검이 아니다 (КНДР)2014. 7. 24.
  8. 계명대학교출판부, 한국 역사의 이해, 2005, ISBN 89-7585-068-4, 233-237쪽
  9.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571쪽
  10. 역사학연구소, 함께보는 한국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6, 276쪽
  11. 한영우, 같은 책, 573쪽
  12.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민족 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ISBN 89-7696-248-6, 330-332쪽
  13. 김기승, 남북협상운동과 통일운동의 개시,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민족 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ISBN 89-7696-248-6, 330-332쪽
  14.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허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반공을 통해 보완하려했던 시도로 볼 수 있다.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ISBN AAB1995060, 163-164쪽
  15. 신진보연대, 신진보리포트 2007년 봄호, ISBN AAL2007070, 136쪽
  16.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 함께, ISBN 89-91221-10-6, 156-162쪽
  17.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ISBN 89-86092-93-X
  18.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Allison)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PDF). 《FRUS 1950 Vol. VII Korea》. 미국 국무부. 373쪽. 2014년 2월 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3월 5일에 확인함. ...the action of the North Korean forces had obliterated the 38th parallel and that no peace and order could be maintained in Korea as long 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remained. 
  19.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PDF). 《FRUS 1950 Vol. VII Korea》. 미국 국무부. 387쪽. 2014년 2월 2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3월 5일에 확인함. 16. Press report June [July] 13 quotes Pres Rhee as voicing determination ROK not to stop at 38th parallel in repelling invaders. 
  20.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 함께, ISBN 89-91221-10-6
  21. , 한국전쟁, 책과 함께, ISBN 89-91221-10-6, 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