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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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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jinnim (토론 | 기여)님의 2009년 6월 17일 (수) 02:40 판

임화수(林和秀; 1921년 ~ 1961년 12월 21일)는 정치깡패이자 영화인이다.

생애

경기도 여주군 출신으로 본명은 권중각이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임화수개명했다. 21살 때 소매치기로 개성형무소에서 2년, 24살 때 장물취득혐의로 2년을 더 옥살이하였다. 학력도 없고 배운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극장을 좋아하여 극장 주변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렸다. 광복 후 그는 서울의 미나도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았으며 점차 영화계의 대부로 급부상하였다.

이정재와의 인연으로 그와 더불어 동대문파의 2인자로 떠오른 임화수는 권력의 비호 아래 국내최초의 외국합작영화인 《천지유정》(1957)을 홍콩과 합작해서 만들어냈으며, 또 《길 잃은 사람들》,《사람팔자 알 수 없다》 등의 영화 15편을 제작했다.

반공예술인단라는 반공단체를 조직해 단장이 되어 자유당 정권과 더욱 밀착했으며 경무대에서 곽영주의 영향으로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울면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폭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그에 대한 평이 당연히 좋지 않았다. 특히 김희갑의 갈비뼈를 뿌러뜨린 이른바 김희갑 구타사건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언론의 화제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권력을 위해서면 출신지와 나이를 속이기는 물론, 남자 배우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여배우들을 권력자에게 '상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정치깡패 이정재가 물러난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자리를 이어받고 반공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유지광 등에게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정치테러를 지시하였다.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집단으로 구타, 많은 대학생들을 살상하게 하는 이른바 고대생습격사건을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5.16 군사정변 후 그가 사형당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자 정치깡패로 몰려 체포되었다. 5.16 쿠데타쿠데타군 재판에서 이정재 · 유지광 · 최인규 · 곽영주 · 신정식 등과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서울형무소 형장에서 곽영주 · 최인규 등과 함께 교수되었다. 이후 그의 비서이던 차민섭(별명: 눈물의 곡절)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임화수를 연기한 배우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