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도요토미 히데요시
기독교 전래 관련 오류
일본의 기독교 전래는 이전 특히 오다 노부나가는 친 기독교의 인물이였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문서의 기술은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Alfpooh 2007년 5월 3일 (목) 00:36 (KST)
평가 부분을 함부로 삭제한 사람 보시오!
그래서 이제는 인용문과 관련기사까지 같이 가져왔소. 이래도 지운다면 당신은 중립적 시각을 위반하는 자인 것이오. 출처를 붙이는 작업 자체가 링크를 걸때 편집이 새로운 외부 링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동화된 스팸을 막기 위해 아래 상자의 단어를 적어주세요. (더 많은 정보) 를 하는데 이 단어를 적을때 한영전환이 귀찮아서 출처를 안붙이는 것을 출처가 없다는 사유로 함부로 편파적 편집을 감행하는데 그런 편집이 편파적이라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번에는 뉴스기사를 인용하였소.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위키백과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 것이오.
이러한 일련의 정황으로 보아 사용자 Gwpei는 명백한 임진왜란 옹호론자인것이오.
- 내정의 문외한은 어디에 나온 근거입니까, 인용에서는 내정의 문외한이라고 한 문장이 없으며, [1],[2] 히데요시의 정책은 에도 막부에서도 계승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히데요시를 따르는 무장이 이시다 미쓰나리 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그럼 끝까지 서군편에 가담한 다른 무장은 무엇이 된다말입니까 ?--Gwpei (토론) 2009년 6월 5일 (금) 09:18 (KST)
- 히데요시를 따르는 무장이 이시다 미쓰나리 밖에 없다는 것? 그랬기 때문에 가토는 바로 동군으로 돌아섰고 다테 역시 동군이 되었소. 서군은 이시다 미쓰나리나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빼고는 딱 세가지 부류뿐이오.
- 이시다 미쓰나리 또는 안코쿠지 에케이의 꼬득임에 넘어간 다이묘.
-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는 가토 기요마사와 원한이 있는 다이묘.
- 이시다 미쓰나리 또는 안코쿠지 에케이와 인연이 있는 다이묘. - 그러나 그나마도 안코쿠지 에케이와 인연이있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배신했음.
이러니 진심으로 소신껏 동군을 간 사람들과 단결력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오. 서군에 끝까지 가담한 다이묘는 딱 보면 가토 기요마사에게 원한이 있는 다이묘네요.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대부분 꼬득임(모리 데루모토등)이나. 각각의 개인적 원한(고니시 유키나가, 우에스기 가게카쓰등)에 의해 움직인 것이오.
- 세키가하라 전퉁 이전 마에다 관저에 모인 장수는 무엇이며, 그 중 서군에 가담한 장수도 이시다 미쓰나리의 꼬득임에 넘어간 다이묘로 치부할 수 있습니까 ?,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재한 인물이고 가토 기요마사 사후, 오사카 전투가 벌어지지요. 그리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또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중재에 힘쓴 인물로 도요토미 가문의 존망을 살핀 인물이요. 그리고, 도요토미 가문을 논하는 데 있어 이시다 미쓰나리와 개인적 감정이 있는 인물이 이에야스를 따랐다고 도요토미 가문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요. 도요토미 가문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생각하시오. --Gwpei (토론) 2009년 6월 5일 (금) 09:36 (KST)
- 그렇소? 그래서 마에다 관저에 모인 다이묘들을 보았소.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 안코쿠지 에케이가 꼬득여 서군 가담
-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개인적 원한으로 서군가담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 세키가하라 전투 주동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 마시다 나가모리(増田長盛)
- 나즈카 마사이에(長束正家)
-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가토 기요마사와의 개인적 원한으로 서군가담
- 조소가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등.
이런식이오. 벌써 대충 4명 이상이 도요토미와는 상관없이 꼬득임 또는 개인원한으로 서군에 가담한 것 맞소. 특히 실제로 오타니 요시쓰구 역시처음에 동군으로 가려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결의에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갔소. 이 와중에 설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설전에서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겨서 오타니 요시쓰구가 서군으로 간 것이오.
- 그럼 나머지 인물은 뭐요? 도요토미 가문을 따른 무장이 이시다 미쓰나리밖에 없는 것이 아니지 않소. 그리고, 오사카 전투 이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화친을 모색한 인물은 뭐요. --Gwpei (토론) 2009년 6월 5일 (금) 09:52 (KST)
- 그렇지만 단일화된 정치권력의 형성 이후, 히데요시는 리더십에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보여준 파격성, 역동성 그리고 신속성은 전시(戰時)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서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이지만, 평화적인 상황이나 중장기적인 국가체제의 정립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리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이 될 수 없었다. [3]는 것이 내정에 대해 문외한인 증거요. 평화적인 상황이나 중장기적인 국가체제의 정립이 필요한 상황에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능력이 바로 내정능력이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정의 달인이였다면 궂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오. 당신은 너무 앞뒤가 안맞는논리로 일관하니 더 말을 삼가하시오. 그리고 [4],[5]같은 글로 마치 도쿠가와가 도요토미의 정책을 모두 다 그대로 사용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문건은 근거가 약하오. 기껏해야 신분간의 차별을 엄격히 하는 거랑 호구조사 두가지 뿐인데 누구나 다 하는 정책을 마치 도요토미 특유의 정책인양 주장하고 있으니 근거가 약한 것이오.
- 검지와 관련된 글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요. 이 백과사전이 근거가 약하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삼으란 말이오. --Gwpei (토론) 2009년 6월 5일 (금) 09:59 (KST)
- 근거가 매우 약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오 거기에는 손견이 원술의 부하로 나오는가 하면 유표가 원소의 부하로 나오는 등 신빙성을 의심할만한 부분도 많이 있소.
암튼 임진왜란 옹호론자인 Gwpei 당신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소. 내 글에 토달지 마시오.
- 특히, 도요토미 가문을 따르는 가신들에 대한 반론이 빈약해 이부분에 대해서는 삭제하겠소.--Gwpei (토론) 2009년 6월 5일 (금) 10:01 (KST)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면 임진왜란이고 임진왜랑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요.
인물을 상징하는 가장 큰 요소를 하나씩 꼽자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기마민족,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인 것이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임진왜란인 것이오. 그러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에 비중을 크게 둬야 합니다.— 이 의견은 61.40.99.242님이 작성하였으나, 서명을 하지 않아 2025년 6월 29일 (토) 08:19 (KST)에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의견을 남길 때에는 항상 의견 끝에 띄어쓰기를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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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대한민국의 pov입니다. 일본의 역사, 특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의 히데요시의 비중을 읽어 보시기바랍니다. --Gwpei (토론) 2009년 6월 10일 (수) 13:15 (KST)
-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왜 이러시나? 일본만의 관점에소 볼 것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오.
- 세계사적 관점속에는 일본사와 한국사가 함께 공존합니다. 그에 따른 평가를 살피실려면, 타언어판의 히데요시도 문서도 참조하기시 바랍니다.--Gwpei (토론) 2009년 6월 10일 (수) 13:21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