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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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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義親王
의친왕 이강
의친왕 이강
사동궁 이화문
사동궁 이화문
의화군(義和君)
재임 1892년 1월 28일 ~ 1900년 8월 17일
의친왕(義親王)
재임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
공(公)
재임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후임 이건(1930 ~ 1945)
이름
이강(李堈)
별호 초명: 이평길(李平吉)
: 사강(士岡)
: 춘암(春菴)[1]
이명(異名): 이천광(李天光)[2]
세례명 비오
신상정보
출생일 1877년 3월 30일(1877-03-30)
출생지 조선 한성부 순화방 숙의 범씨 궁
사망일 1955년 8월 16일(1955-08-16)(78세)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부 안국동별궁
학력 필운 학당
게이오 의숙
로노크 대학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왕조 대한제국
부친 고종
모친 모후: 명성황후
사친: 귀인 덕수 장씨
형제자매 순종
완친왕
의민황태자
덕혜옹주
(조졸 적·서 형제: 8명)
배우자 의친왕비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
측실(전측실 포함) 21명
자녀 12남(13남) 9녀
기타 친인척 처부모: 김사준·창원 황씨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
능묘 홍릉과 유릉 경내 의친왕묘
웹사이트 의친왕기념사업회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군사 경력
의화군 이강
의화군 이강
복무기간 1906년 4월 8일 ~ 1910년 8월 29일
최종계급 대한제국 육군 부장
서훈 1905년 대한제국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1912년 일본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
1924년 일본 대훈위국화대수장 (大勳位菊花大綬章)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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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1877년(고종 14)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덕수 장씨이다. 비(妃)는 의친왕비이다. 측실(側室)은 21명이었고 9명 이상이 떠났다.

1892년(고종 29)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고종 30)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와 길례를 올렸다. 1894년(고종 31) 일본 보빙대사를 다녀왔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고 10월에 의원면직 하였다. 을미사변 배후에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이 있다고 추정하고 복수를 계획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 유학을 떠났고 1896년(고종 33) 게이오기주쿠 대학교를 다녔다. 동년 동경(東京)에서 많은 빚을 졌다.[3] 일본 유학 동안 학업 성취도가 낮았다. 1899년(고종 36)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로노크 대학교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를 다녔는데 학업을 게을리 하였다. 평판이 좋지 못하였고 미국인 여러 명과 염문설이 났다.[4] 또한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오가느라 미국 은행에 금액을 차용한 뒤 상환하지 못해 피소되기도 하였다.[5] 1900년(고종 37)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그해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에서 유학 중이어서 누명을 벗었다. 1905년(고종 42) 미국에서 귀국하였다. 이후 러일전쟁 일본 승리 축하 대사,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1906년(고종 43) 의친왕부(義親王府)는 어업장을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 카이시 겐타로)에게 20년 간 임대하였다. 1909년(순종 2)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2만여 원을 6만 원이라고 거짓말 하고 돈을 착복하였다.[6]

경술국치로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의 지위와 은사금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및 매국 관료보다 많은 액수였다. 1911년 출간된 도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했다.[7] 1912년 일왕(日王)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왕공족 중 유일하게 1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생활하였다. 1919년 11월 대동단김가진, 전협, 최익환 등과 연락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독립신문》기사에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라고 실렸다. 그러나 의친왕은 직접 서명한 신문조서에서 "망명은 전협 등 협박에 의한 것으로 본인은 시종일관 벗어나려 노력했다."라고 하였다.[8] 이어서 제2차 독립선언서 서명에 대해 "본인은 모르는 일이고 괘씸한 일이다."라고 하였다.[9] 

“日本之朝鮮(일본지조선)”(유라쿠샤(有樂社), 1911)에 실린 이강의 글씨로 "칠 안에 아교를 넣듯"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1920년 수많은 어민들이 '의친왕부의 어업장을 임대한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 카이시 겐타로)의 어장 독점을 반대하는 탄원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향추원태랑은 거두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의친왕부 어장의 정치어업 경영에서 구축되었다. 1929년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비문(碑文)을 썼다. 상해 망명 실패 이후 "의친왕은 일본으로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계속되는 비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일제로부터 형식적으로 받았던 공(公)의 지위에서 물러났다."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의친왕은 스스로 지병인 다리 통증으로 은거를 청원했고 치료를 위하여 일본 벳푸(別府市)에 수시로 방문했다. 1930년 장자 이건(李鍵)에게 공위를 물려주었고 왕공족 및 공(公)의 공무를 면제받았다. 동년 조선총독부는 공위를 물려받은 이건공가(李鍵公家)에 부당한 압력을 가하여 어업장을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 카이시 겐타로)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945년 광복독립운동가 이관구(李觀求)에게 별장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단 김구,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을 지낸 일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김규식신탁통치 문제로 김구와 노선을 달리하고 한국혁명당을 이끌었으므로 사실과 맞지 않는다. 또한 한국독립당 고문을 역임한 것은 동명의 독립운동가 이강(李剛)의 사적이다.[10] 또한 "남북한 통일 대한민국 선거를 주장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있었다."라는 주장도 역사적 사실 근거가 없다.

1947년 박응래(朴鷹來) 일당이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라고 하자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는 사기를 당했다. 의친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으나 도리어 일당에게 공갈협박을 당했고 1948년에 고소를 취소했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가난, 병고, 영양실조로 고생했다. 임종 직전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안국동별궁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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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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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1877년(고종 14)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는 춘암(春菴)이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덕수 장씨이다. 귀인 장 씨는 덕수 장씨 족보에서 신풍부원군 장유의 5대손 장석정(張錫鼎)의 딸이다. 하지만 장석정은 1736년(영조 12)에 태어나 1795년(정조 19)에 사망하였다. 장석정의 처 경주 정씨는 1740년(영조 16)에 태어나 1797년(정조 21), 밀양 박씨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하였다. 그러므로 1838년(헌종 4)에 태어난 귀인 장 씨의 친생부모가 될 수 없다. 조선은 일부일처다첩제인데 경주 정씨밀양 박씨 두 명이 처(妻)로 기록된 이유는 알 수 없다.[11] 귀인 장씨는 어릴 적 궁중에 들어와 명성황후 혹은 숙의 범씨의 궁녀였다고 한다. 1877년(고종 14)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축출되었고 1887년(고종 24)에 사망하였다. 1900년(고종 37)에 숙원(淑媛), 1906년(고종 43)에 귀인(貴人)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고종의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당호(堂號)를 받지 못하였다. 의친왕의 외가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으나 외가 덕수 장씨와 꾸준히 왕래하였다.[12]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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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1781년(고종 19) 궁중에서 한문을 배웠고[13]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 학당에서 수학하였다.[14] 일찍이 군(君) 책봉을 받지 못하고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의 양자와 같은 자격으로 양육되었다. 이는 "궁중에는 왕세자(순종) 탄생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궁중에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법도 때문이었다. 훗날 명성황후는 의친왕을 군(君)으로 봉하고 궁중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신정왕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 때문에 의친왕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다. 오랫동안 군(君)으로 책봉되지 않은 채 생모 귀인 덕수 장씨의 집에서 지내며 평민 생활을 이어가자 결국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시중의 무뢰한과 어울렸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였고 명성과 인망이 없었다.[15]

1892년(고종 29) 의화군으로 봉해졌다. 1893년(고종 30) 김사준의 딸 김숙(金淑)·김덕수(金德修)과 길례(혼인)를 올렸다. 의친왕은 "후일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니, 김사준(처부, 妻父)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예측하였다. 그리하여 의친왕을 따르는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우는 탓에 여흥 민씨의 노복들은 그들을 피하였다.[16] 나이가 차서도 부덕하고, 여러 차례 돈을 탕진하고,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여러 측실을 두었다.[17] 이 때문에 부황 고종은 우려하며 의친왕이 보통 사람과 같기를 원하였다.[18] 이하영은 의친왕의 실덕과 돈을 탕진하는 것을[19] 서재필은 여성 편력에 대해 비판하였다.[20] 윤치호는 1895년(고종 32) 당시 의친왕은 행동이 조심스러우며 주변 상황에 대해 신경을 쓰는 성품이라고 하였다.[21] 하지만 후일 윤치호도 의친왕의 인품이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22]

일본 망명·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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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내의원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어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금방 의원면직 하였다.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이 두려워서 나흘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있었다.[23] 의친왕은 을미사변운현궁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 영선군(친일반밍족행위자)이 꾸민 음모라고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검객 또는 일본 낭인을 모으고 청나라 세력과 닿아 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복수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으로 망명 유학을 떠났다. 1896년(고종 33) 게이오기주쿠 대학교을 다녔다. 동년 동경(東京)에서 3,000원의 부채를 졌는데 1895년(고종 32) 당시 총리 대신 연봉이 5,000원이었다.[24]

1897년(고종 34) 고종은 의친왕이 일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하였다.[25] 그 배경에는 의친왕의 정치 상황과 인품 문제가 있었다. 고종은 의친왕이 금릉위 박영효, 유길준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범진(李範晋)은 고종에게 「의친왕이 민상환(閔商鎬, 친일반민족행위자)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고 있고,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와 왕래하고 있다.」고 하였다.[26] 그리하여 고종은 의친왕의 나이가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어떠한 사고를 일으킬지라도 헤아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더구나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학업 성취도가 낮았다.[27]

미국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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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고종 38)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0년(고종 39) 미국 각지를 순행하였고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되면서 의왕(義王)으로 책봉되었다. 그해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황위에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서 아무 연관이 없었다. 그렇다 하여 고종의 의심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중략)…
권호선(權浩善)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약서(盟約書)를 만들었지만 그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명확하지 않아서 사실 효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고치고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皇太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넷째,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다섯째, 이 일을 누설하는 경우에는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것입니다.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28]

1901년(고종 40)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서광범 등을 동기·동창으로 만났다.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29]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돌아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의친왕은 학업에 전혀 매진하지 않았고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또한 여러 차례 염문설이 났고 사치스러웠다. 1905년(고종 42) 의친왕을 몇 번 만났던 이승만은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어 보이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라고 하였다.[30] 의친왕과 이승만이 만났던 계기는 당시 이승만은 밀사 임무를 맡고 워싱턴으로 갔었고, 의친왕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하였다.

1905년(고종 42) 고종은 미국에서 유학 중인 의친왕의 품행에 대한 평판이 나쁘고 학업과 관련해서는 하등 얻는 바가 없는 것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 같은 성품 및 행실을 갖추기를 원했다.[31] 다만 의친왕이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면 운현궁 일가와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므로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몇 년 더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32] 하지만 의친왕은 대한제국으로 귀국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대한제국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고종은 의친왕에게 5만 원을 주며 미국에서 계속 유학하라고 하였다.[33] 이후 서모 순헌황귀비이근상(친일반민족행위자)을 일본으로 보내 의친왕에게 은전 300만 원을 주며 귀국하지 못하게 하였다.[34] 그러나 더 이상 외국에 체류할 수 없다는 뜻이 완강한 의친왕은 1905년(고종 42)에 귀국하였다. 고종은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라고 하였다.[35]

대한제국 귀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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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고종 42) 고종에게 금광사업권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36] 1906년(고종 43) 육군 부장(陸軍 副將)에 임용되었고 '대훈위금척대수훈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았다. 이어서 일본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 1907년(순종 원년) 서제(庶弟) 영친왕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의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공식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의친왕은 덕망이 없고, 돈을 탕진하고, 학업에 전혀 매진하지 않고, 여색을 탐하였다. 부황 고종은 의친왕의 실덕, 운현궁 일가를 향한 을미사변 복수 계획,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등으로 탐탁지 않아 했다. 의친왕의 사친 귀인 덕수 장씨는 오래 전에 사망하였고 외가 덕수 장씨는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영친왕의 사친 순헌황귀비는 후궁이었지만 황후가 없는 내명부에서 황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조정은 매국 관료와 일제가 깊숙이 내정 간섭을 하고 있었다.[37] 의친왕은 동년 3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38]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체결 직후 일본으로 피서를 떠났고, 다음 달 11일부터 9월 3일까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39] 1909년(순종 3)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 장례식 조문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다.[40] 하지만 다음 달 일본은 돌연 의친왕의 파견을 취소하고 민병석(친일반민족행위자)(閔丙奭)으로 변경하였다. 의친왕은 신용이 없고 인격이 실추되었으며,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이 생전에 특히 싫어한 사람이 의친왕이라는 이유였다.[41] 1910년(순종 4) 경술국치를 넉 달 앞둔 4월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과 기생을 데리고 질탕하게 풍류를 즐겼다.[42] 8월 신한민보 기사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의친왕은 나라가 망해도 친왕으로 대우한다는 바람에 아무 걱정 없이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라고 실렸다.[43]

국권 피탈(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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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공족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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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의친왕은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 지위와 은사금 83만 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및 매국 관료보다 많은 액수였다. 당시 쌀 80kg 가격이 7원이었으니, 83만 원은 쌀을 약 118,571 가마를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1911년 출간된 도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44] 1912년 일왕(日王)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1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생활하였다.

상해 망명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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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고 "일제 치하의 황족으로 사느니 자유 대한의 국민으로 살겠다."라고 선포하였다. 대동단 독립선언서에 스스로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고 본명 '이강'으로 서명하고,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하였다.[45] 의친왕은 독립운동가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46]

一. 일본은 몇몇 매국노 간신과 결탁하여 나의 부황(고종)과 모후(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부모를 잃은 원한을 열국에 호소하기 위함이다.

二. 3월 1일 이래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하나 되어 맨손으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적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적수공권의 인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인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피는 식지 않았다. 강건한 민족정신을 가진 우리는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三. 10년 전 맺어진 합병조약은 무력과 위협을 앞세워 체결된 것이다. 부황께서는 결코 합병조약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 한일합병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四. 나 역시 한국민의 한 사람이다. 독립된 한국의 일개 서민으로 살망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곳에 가 정부의 여러 책임자들과 손잡고 생사를 같이하며 협력하여, 동포들이 겪는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나의 결심은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조국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다.[47]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및 주선하였다. 11월 9일 의친왕은 측실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고종이 외국인에게 120만 원을 맡긴 증서가 있으므로 함께 대동해야 한다고 하였다. 의친왕은 1911년 혹은 1912년 고종으로부터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한 돈이 상해(上海)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돈을 받으라는 뜻의 증서'를 받았었다.[48] 하지만 이는 사전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김흥인과 최효신의 여행증명서가 준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음날 오전에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고, 평양에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11일 안동현역에서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49] 황실 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상해 망명 시도 실패와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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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일본 경찰이 상해 망명과 관련하여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50]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처남)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

더구나 천엽료(千葉了)가 대동단 사건에 대해 달리 진술할 말은 없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였다.[51]

참으로 일신 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 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 상에 관해서는 예산 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귀인 덕수 장씨)와 헤어져 명성황후(閔妃)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순헌황귀비(嚴妃)에게 억압 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李王職)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의 연유 하는 바를 통찰 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 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절망(切望, 간절히 바람)한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 자유를 박탈당했다.[52]

상해 망명 시도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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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에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실렸다.[53] 윤치호는 의친왕의 망명 시도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54]

의친왕이 이 나라를 떠나려고 시도하다가 의주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조금 나아졌다면 몰라도, 의친왕은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대의명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친왕이 선동가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친왕부의 어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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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의친왕에게 가덕도부터 거제도에 이르는 연안 대구 어업장을 하사하였다. 1906년(고종 43) 의친왕부(義親王府)는 소유하고 있는 어업장을 일본인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 카이시 겐타로)에게 20년 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55]

1. 임대 기간은 20년으로 한다.
2. 매년 1만 5,000원을 연 세금으로 하여 매년 3월 30일에 상납 한다.
3. 현재 어획량을 평균 계산하면, 대략 8만 원의 가치가 된다.
4. 어획량이 증가할 경우, 증가한 수익의 10분의 2를 정액 외에 추가로 상납 한다.
5. 매년 의친왕궁에서 파견하여 어획을 조사한다.
6. 어구 및 어법을 개선하고 어장을 정리한다.
7. 임차인은 어구·어법 및 어장을 개선할 의무를 가지며, 만약 이를 태만히 하여 어획량이 감소할 경우, 이 계약을 무효로 하고 의친왕궁에서 철회하여 타인에게 임대할 수 있다.
8. 20년 임대 계약 종료 시, 어장 시설 및 어구는 모두 헌납한다.
9. 임차인은 어떠한 이유로든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단 의친왕궁의 허가를 받을 경우 이 한계에 해당하지 않는다.[56]

1910년에 어업법에 의거하여 의친왕부가 72개 어장에 대한 면허를 받았고, 어업령 시행 이후에도 면허의 효력은 존속되었다. 의친왕부의 어장은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 카이시 겐타로)이 계속 임차하였다. 1920년에 어업권 존속기간이 만료되자 71개 어장의 어업 면허가 갱신되었다. 어업인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 3,268명이 향추원태랑의 어장 독점을 반대하는 탄원운동을 하였다.[57] 향추원태랑은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71개 어장 중 44개 어장을 의친왕부에 반환하고 27개 어장에 대해 10년 동안 임차하기로 하였다. 향추원태랑은 임차한 어장에서 일본식 대규모 정치어업을 경영하였고, 상당 부분은 한국인에게 높은 임대료를 받고 다시 빌려주었다. 이에 대해 의친왕부 사무관 흑기(黒崎, 구로자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향후 향추원태랑은 부산의 거두로 두각을 드러냈다. 조선총독부는 향추원태랑의 계속적인 어장임차를 보장하기 위하여 의친왕부의 어업 면허를 갱신해 주었다.

1930년에 어업권 존속기간이 만료되자 이건(李鍵) 명의로 어업면허를 갱신하였다. 동년 의친왕의 공(公) 직위를 이건(李鍵)이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이건공 가(李鍵公家)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였고, 향추원태랑은 어장을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싼 값에 매수하였다. 이건(李鍵) 측은 조선총독부 주선으로 체결된 불공정 계약의 부당함을 총독에게 제출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러하듯 향추원태랑이 대성한 기반은 의친왕부 어장의 정치 어업 경영에서 구축되었다.[58]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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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고종 43)부터 1909년(순종 3)까지,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의병 명단을 기록한 비석으로 1929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세웠다. 비석 전면에는 하청사(河淸祠)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동의한 맹주 참판 최익현(盟主 參判 崔益鉉)을 비롯하여 유림 264명의 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비석을 건립한 뜻을 새겼다. 비문(碑文)은 의친왕이 썼다. 하청사(河淸祠)는 1928년 이희봉, 권영모 등 유림 34인이 발의하여 일본에 항거한 애국지사 최익현, 임병찬, 오계업, 박재규, 박재구 등 5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하청사를 건립하였다. 하청사는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동의기념비만 남아 있다.[59]

공(公) 위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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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지병을 이유로 일왕(日王)에게 은거(공 직위 반환)를 청원하였고, 왕황족회의 결의로 은거 허가를 받았다. 6월에 공위를 장자 이건에게 물려주었다. 왕공족 및 공(公) 의무가 면제되고, 군사령부를 면직하고 [60] '이강 전하(李堈 殿下)'가 되었다.[61] 일각에서는 "망명 사건의 처벌로 공위를 박탈 당하고, 국내 여행의 자유를 빼앗겼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라고 하였으나 1919년 '상해 망명 시도 사건'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더구나 의친왕의 행보와 맞지 않는다. 의친왕은 은거를 허가받기 직전 일본 포드 공장을 방문하였다.[62] 1930년 8월 동경(東京)에서 귀국하였다.[63] 1931년 장자 이건의 결혼식으로 동경(東京)을 다녀왔고 벳푸(別府市)에 머무르기도 하였다.[64] 1933년 일본에서 서울 영등포역으로 귀국하여[65] 조선 호텔에 투숙하였다.[66] 동년 5월[67]과 9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68] 백천온천을 다녀왔다.[69] 1934년 장녀 이영(李玲) 결혼으로 귀국하였다. 5월 동경(東京)으로 갔고[70] 6월에 서울로 돌아왔고[71] 곧 부산을 다녀왔다.[72] 1935년[73]과 1936년에도 일본을 다녀왔다.[74] 이러하듯 의친왕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전국 각지 및 일본을 수시로 여행 다녔으며, 1940년에도 동경(東京)을 다녀왔다.[75]

1945년 광복독립운동가 이관구(李觀求)에게 별장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관구는 여기서 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술활동을 하고, 항일투쟁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의용실기》를 저술하였다.[76] 이외에 의친왕은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서 권총을 쏘며 화풀이를 했는데, 사격술이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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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는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77], 김구[78], 김규식[79] 등 임시 정부 인사들이 귀국한 당일 의친왕을 만나러 갔다."라고 하였는데 사실이 아니다. 임시 정부 인사들은 귀국 당일 곧장 숙소로 이동하였고, 미리 찾아온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했다. 12월 6일 의친왕이 직접 김구를 만나러 갔다.[80] 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가 결성되었다.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척극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였다.[81] 의친왕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82]

1947년 왕공족(王公族)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해 박응래(來鷹來), 김선태(金善泰), 최시화(崔時化) 등이 의친왕에게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83] 곧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사동궁은 국가 재산이라 매각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대법원은 묵살하였다. 의친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다. 하지만 박응래와 최시화가 결탁하고 변호사를 내세워 의친왕에게 고소를 취소하라고 공갈 협박했고, 1948년 고소를 취소하였다.[84] 이후 안국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의친왕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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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은 적어도 1896년(고종 33)부터 측실을 두었다.[85]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미국인 몇 명과 염문설이 났고 1905년(고종 42) 일본에서 동경(東京)의 무희(舞姬)들에게 돈을 탕진하였다.[86] 수화당(修和堂) 등전(후지타) 씨(藤田氏, ふじた)는 늦어도 1905년(고종 42), 수관당(修觀堂) 정 씨(鄭氏)와 기생 향란(香蘭)은 적어도 1908년(순종 2)에 측실이 되었다. 1908년(순종 2) 기생 이연연, 1909년(순종 3)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을 측실로 들였다. 경술국치 직전 기생들을 데리고 놀러 다녔다. 1910년대에 수현당(修賢堂) 정운석(鄭雲石), 조병숙(曺秉淑), 수덕당(修德堂) 이희춘(李喜春), 수완당(修完堂) 김정완(金貞完), 수길당(修吉堂) 박영희(朴英喜), 수은당(修恩堂) 송은점(宋恩点)을 측실로 들였다. 1920년대에 수경당(修慶堂) 김창희(金昌熙), 김금덕(金今德), 기생 강선옥(姜善玉), 오소홍(吳小紅), 장학선(張鶴仙), 이유색(李柳色), 이유앵(李柳鶯)을 측실로 들였고 장안 기생들과 풍류를 즐겼다. 1930년대에 함개봉(咸開鳳), 김혜수(金蕙洙), 홍정순(洪貞順)을 측실로 들였다. 기생 향란(香蘭)은 1908년(순종 2)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수은당(修恩堂) 송은점(宋恩点)은 1922년에 의친왕을 떠났다. 김금덕(金今德)은 1932년에 의친왕으로부터 축출되었고 이후 윤(尹) 씨와 혼인하였다. 기생 이유색(李柳色)은 남작 조명구(趙命九), 이유앵(李柳鶯)은 장택상(張澤相)의 측실이 되었다.[87] 강선옥(姜善玉), 오소홍(吳小紅), 장학선(張鶴仙)도 의친왕을 떠났다. 1961년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은 칠궁(七宮)에서 의친왕비를 보좌하였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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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정부 지원금이 끊겨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안국동별궁으로 돌아왔다. 1955년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비오'이고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88] 8월 16일 영양실조 후유증, 스트레스, 화병 등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안국동별궁에서 타계하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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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처음 의친왕묘(義親王墓)가 조성된 곳은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다. 1965년 의친왕묘는 사친 귀인 덕수 장씨 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96년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홍릉과 유릉 권역 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89]

명예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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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의친왕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직계 후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요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의친왕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전시회, 공연 등 문화예술행사와 학술회를 통해 의친왕을 재조명하고 있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은 의친왕의 장손자 이준(李準)이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종특별자치시 학술 행사에서 의친왕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의친왕의 공적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90]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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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사망
1877년 3월 30일
(음력 2월 16일)
조선 조선 한성부 순화방 범숙의 궁
1955년 8월 16일
(음력 6월 29일)(78세)
한국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별궁

조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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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조부 문조
文祖
전주 1809 - 1830 순조
純祖

순원왕후
純元王后
조선 추존 국왕
대한제국 추존 황제
조모 신정왕후
神貞王后
풍양 1808 - 1890 풍은부원군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德安府夫人 恩津 宋氏
사친 조부 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
전주 1821 - 1898 남연군
南延君

군부인 여흥 민씨
郡夫人 驪興 閔氏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사친 조모 순목대원비
純穆大院妃
여흥 1818 - 1898 민치구
閔致久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여흥부대부인
驪興府大夫人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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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성명 생몰년 부모 비고

고종
高宗

전주
1852 - 1919 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

순목대원비 여흥 민씨
純穆大院妃 驪興 閔氏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명성황후
明成皇后
여흥 아명: 자영
玆暎
[91]
1851 - 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
驪城府院君 閔致祿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韓昌府夫人 韓山 李氏


사친 귀인 장씨
貴人 張氏
덕수 1838 - 1887 1906년 귀인 추증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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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형제(嫡兄弟)
작호 성명 생몰년 배우자 비고
1 원자
元子
1871 - 1871 쇄항증으로 사망
2 공주
公主
1873 - 1873
3

순종
純宗

이척
李坧
1874 - 1926 순명효황후 여흥 민씨
純明孝皇后 驪興 閔氏

순정효황후 해평 윤증순
純貞孝皇后 尹曾順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4 대군
大君
1875 - 1875
5 대군
大君
1878 - 1878
  • 서형제(庶兄弟)
작호 성명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완친왕
完親王
이선
李墡
1868 - 1880 영보당 귀인 이씨
2 옹주
翁主
영보당 귀인 이씨
3 옹주
翁主
내안당 귀인 이씨
4 의민황태자
懿愍皇太子
이은
李垠
1897 - 1970 순헌황귀비 영월 엄선영 자행황태자비 이방자
慈行皇太子妃 李方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5 황자
皇子
이육
李堉
1914 - 1916 광화당 귀인 이완흥
6 황자
皇子
이육
李堣
1915 - 1916 보현당 귀인 해주 정순기
7 덕혜옹주
德惠翁主
이덕혜
李德惠
1912 - 1989 복녕당 귀인 충주양춘기 전남편
소 다케유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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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본관 성명 생몰년 부모 비고
왕비
王妃
의친왕비
義親王妃
연안 김숙
金淑

김덕수
金德修
1880 - 1864 김사준
金思濬

창원 황씨
昌原 黃氏
연원군부인
延原郡夫人

지밀어머니
처남
성명
생몰년 배우자 비고
1 김성기
金聖基
1878 - 1916[93]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전의 이씨
全義 李氏

전주 이씨
全州 李氏
2 김택기
金澤基
1884 - 1958 해평 윤씨
海平 尹氏
3 김춘기
金春基
1894 - ? 박정식
朴貞植
6·25 전쟁납북
4 김경기
金敬基
1901 - 1971 남소아지
南小兒只
5 김갑기
金甲基
1889 - ?[94]

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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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호 성명 생몰년 부모 비고
1 수화당
修和堂
등전(후지타)씨
藤田氏
(ふじた)
2 수관당
修觀堂
정씨
鄭氏
? - 1912[96]
3 수인당
修仁堂
김흥인
金興仁
1884 - 1961 이후[98] 김일선
金一善

이씨
李氏
  • 상민
  • 1894년 궁녀 입궁
  • 1909년 측실 입궁
  • 이명(異名): 김은현(金隱現)
  • 오빠: 김영욱(金永旭)[99]
4 수현당
修賢堂
정운석
鄭雲石
5 조병숙
曺秉淑
6 수덕당
修德堂
이희춘
李喜春
7 수완당
修完堂
김정완
金貞完
1894 - ? 김성환
金聖煥

주세창
朱世昌
[100]
8 수길당
修吉堂
박영희
朴英喜
1891 - ? 박영록
朴永祿

강씨
姜氏
[101]
9 수경당
修慶堂
김창희
金昌熙
10 함개봉
咸開鳳
11 김혜수
金蕙洙
12 홍정순
洪貞順
1920 - 1971

전측실(前側室)

당호 성명 생몰년 비고
1 수은당
修恩堂
송은점
宋恩点
2 김금덕
金今德
1909 - 1975
3 이연연
4 향란
香蘭
  • 기생[105]
  • 1908년 미국 유학
5 강선옥
姜善玉
6 오소홍
吳小紅
1892 - ?
7 장학선
張鶴仙
1906 - 1970
  •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 소리 예능 보유자
8 이유색
李柳色
1900 - ?
9 이유앵
李柳鶯
1905 - ?
  • 기생
  • 이유색의 사촌 동생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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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족보에 등록된 자녀는 21명(12남 9녀)으로 의친왕과 측실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친왕비는 서자녀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일부 측실은 황손을 사동궁(寺洞宮)으로 보내고 재혼하였다. 다만 의친왕비의 친필 유훈에는 「…(중략)… 해청[이광(李鎤)]은 이미 죽었으니 그 남은 26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다들 잘 되길 바라는 바이다.」라는 문장이 있다.[109] '남은 26인'에 이미 사망한 이우(李鍝), 이방(李鎊), 이광(李鎤)을 포함하면 의친왕의 자녀는 29명이다. 1906년(고종 43) 수화당(修和堂) 등전(藤田, 후지타·ふじた) 씨가 낳은 아들도 포함하면 30명이 된다.[110]

황손[111]

황실명 아명 호적명 출생 사망 생모 출계
비고
1 이영
李玲
길순 해완 1918 1981 수덕당 계동궁 이기용
2 이진
李珍
길운 해원 1919 2020 수덕당 계동궁 이기용
3 이찬
李瓚
길연 해춘 1920 2009 수완당 계동궁 이기용
4 이숙
李琡
길영 해숙 1920 사망 수길당 계동궁 이기용
5 이공
李玜
길상 해경 1930 생존 김금덕 의친왕비
6 이장
李璋
희자 희자 1940 2015 김혜수
7 이용
李瑢
숙기 해란 1944 생존 홍정순
8 이현
李現
향숙 해련 1950 생존 홍정순
9 이민
李玟
창희 창희 1950 생존 김혜수
  • 아들
황실명 아명 호적명 출생 사망 생모 출계
비고
1 이심세 1906 1908 수화당 [112]
1 이건
李鍵
용길 모모야마 겐이치 1909 1990 수관당 일본 귀화
2 이우
李鍝
성길 1912 1945 수인당 영선군
3 이방
李鎊
홍길 해진 1914 1951 수현당 소현세자 파 이기손
4 이창
李鎗
창길 해직 1915 사망 조병숙 은전군 파 이헌용
5 이주
李鑄
수길 해일 1917 1982 수인당 대궁 이인용
6 이곤
李錕
명길 1919 1984 수인당 의친왕 후계자
7 이광
李鎤
형길 해청 1920 1952 수은당 계동궁 이기용
8 이현
李鉉
경길 경길 1922 1996 수경당
9 이갑
李鉀
충길 해룡 1938 2014 함개봉
10 이석
李錫
영길 해석 1941 생존 홍정순
11 이환
李鐶
문길 해선 1944 생존 김혜수
12 이정
李鉦
정길 해준 1947 생존 홍정순

손자

[편집]

의친왕 가(家)는 6남 이곤이 계승하였다. 이곤은 1955년 의친왕, 1964년 의친왕비의 장례 때 상주를 지냈다. 다음으로 이곤의 장남 이준이 이었다. 현재 사동궁(寺洞宮) 사손·의친왕 가(家) 종손으로서 황실 후손들을 이끌고 있다.

성명 출생 배우자 비고
1 사동궁 사손 이준
李準
1961 김성자
金成子
  • 이곤(李錕)의 아들
  • 의친왕 가(家) 종손
2 황사손 이원
李源
1962

의친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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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기념사업회(義親王記念事業會)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 독립운동가의 자손, 황실독립운동의 중심 의친왕을 존경하는 국민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이다.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22년 설립되었다. 의친왕가 종손 이준 황손이 회장, 현 대한제국 황실가문 최연장자 이해경 왕녀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순종순정효황후가 설립한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전 세계에 흩어진 의친왕의 유물을 한데 모으고,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을 함께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 전시 했다. 의친왕과 관련된 사료와 유물을 수집 및 연구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 및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양력 8월 15일 의친왕 기신제를 봉행하는 주관단체이다.

의친왕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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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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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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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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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6월 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04.27)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05-25)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08-06)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2022년 10월 14일) 경운박물관/의친왕기념사업회 지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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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복 70주년] 선친 의친왕 독립운동 행적 찾아나선 황손 이석 씨 "일제가 왜곡한 황실 역사 바로 잡아야". 2015년 8월 13일. 2021년 11월 29일에 확인함. 
  2.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청 소식지 > 국가유산사랑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월면과 의친왕 이강의 인연"|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G8pRIP1v3X1G1nliJwAKdkBTTKKfdmSyOnhxQKrzVc7Lzg2LlL7NuWWp78v87RbN.cha-was01_servlet_engine1?nttId=85606&bbsId=BBSMSTR_1008&pageUnit=0&search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 一. 本省來機密公信 > (49) [義和宮·朴泳孝 등의 動靜報告]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30  광무 > 11년/융희 1년 1907년(광무 11년/융희 1년) > 8월 3일  미국 언론, 미국 대학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황태자 의화군을 조명함
  5. 정병준 (2023). “김규식과 의친왕: 미국 유학시절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52》. 
  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統監府文書 6권 > 一. 憲兵隊機密報告 > (483) 義和宮에 관한 件
  7. 《日本之朝鮮》. 有樂社. 1911.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大同團事件 Ⅰ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日文)  李堈公 訊問調書(第1回)”.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大同團事件 Ⅰ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日文) 李堈公 訊問調書(第2回)”.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0. 박종인 (2025년 4월 9일). “의친왕 후손, 남의 공적을 훔치다: 명예세탁1-공립협회”. 《땅의 역사》. 
  11. 《덕수장씨족보 갑인보(德水張氏族譜 甲寅譜)》 548 - 550쪽 
  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  一一. 保護條約 一∼三 > (27)[宮中·政界 및 한국사회의 동정 보고 件] "궁중에 있어서는 이번에 드디어 義和宮 전하를 귀국시키는 것으로 내정하고 同 전하의 외척 張 某 외 1명이 밀지를 띠고 出迎者로서 지난 13일 일본으로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
  1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인물자료 > 이강(李堈) "5세에 宮內에서 漢文 修學"
  14. 박관우 (2013년 10월 27일). “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3)”. 《BreakNews》. 2020년 9월 15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단 박관우는 자료라고 했을 뿐 명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15. 한국사료총서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0년 丙午(1906년) ①  > 18. 李堈의 환국
  16. 한국사료총서 > 『梅泉野錄』 제1권 > 下(1894년 이전) ④  > 6. 이강의 부인 김씨
  1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9년(광무 3년, 기해년) 1월 25일 수요일 화창한 날씨
  18. 한국사료총서 > 『梅泉野錄』 제5권 > 隆熙 元年 丁未(1907년) > 2. 英親王李垠 황태자 책봉
  1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9년(광무 3년, 기해년) 1월 25일 수요일 화창한 날씨
  2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8년(개국 507년, 광무 2년, 무술년) 5월 2일(음력 12일)《월요일》 더움. 「미국과의 사적인 교류를 통해 의친왕이 처신을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재필 박사는 의화군의 성적 갈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ʻʻ주여 감사합니다. 더 이상 의화군의 후손은 없겠군요!ʼʼ」
  2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5년(조선 개국 504년, 고종 32년, 을미년) 8월 17일(음력 27일) 토요일 어제처럼 더운 날
  2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년, 광무 9년, 을사년) 10월 16일 월요일
  2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5년(조선 개국 504년, 고종 32년, 을미년) 10월 9일(음력21일) 《수요일》
  2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 一. 本省來機密公信 > (49) [義和宮·朴泳孝 등의 動靜報告]
  2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 二. 和文電信往復控 >(225) [日本에서 義和君 召還 件]
  2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7년(개국 506년, 광무 1년, 정유년) 8월 17일《목요일》 날씨 변화무쌍
  2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21 > 1897년(고종 34년) 5월 9일, 5월 25일
  2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 1904년(고종 41년) 3월 11일 법부 대신 이지용, 황제 폐위를 모의한 일본 유학생 출신 장호익 등의 공술 내용을 보고함
  29.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0페이지
  30.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판. 新太陽社. p. 106쪽. 
  3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 > 一. 本省往電 一∼四 > (50) 義和宮 유학문제에 관한 건
  32.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 九. 本省往機密 一·二 > (14) 義和宮의 진퇴에 관한 한국 황제의 의향 보고의 건
  3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역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9년 乙巳(1905년) ① > 27. 의친왕 이강의 미국유학
  3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역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9년 乙巳(1905년) ② > 50. 義親王李堈의 일본 체류
  35. 승정원일기 >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 3월 13일(경진, 양력 4월 6일) 맑음 13번째 기사
  3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년, 광무 9년, 을사년) > 11월 2일 《목요일》
  37.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제5권 > 隆熙 元年 丁未(1907년) > 2. 英親王李垠 황태자 책봉
  38. 승정원일기 > 고종 44년 정미(1907, 광무) 3월 12일 3번째 기사
  39.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1907년 07월 31일 "의친왕 전별"
  40. 승정원일기 > 순종 3년 기유(1909, 융희) 9월 16일 2번째 기사
  4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統監府文書 7권 >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 (哈爾賓事件書類 一∼六, 伊藤 公遭難事件書類 一~四, 安重根及合邦關係事類 一~三, 하얼빈事件憲兵隊報告一~三) > (81) 일본 파견 特使 변경에 관한 件
  42.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 1910년 4월 9일 "親王宴樂", "잘노렸군"
  4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근대사료DB > 신한민보 > 부끄러운 줄 모르는. 1910년 8월 3일 면수 3 단수 6
  44. 《日本之朝鮮》. 有樂社. 1911. 
  45. 황손 이석씨 "아버지 의친왕 진면모 알려지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한국일보
  46. 주명준, 〈의친왕의 상해 망명기도 사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황실학논총》 제7호, 한국황실학회, 2006년, 87~109쪽
  4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관련단체 Ⅱ > Ⅵ. 신한청년당 > 8) 新韓靑年黨의 부흥에 관한 건 "皇子의 복수주의"
  48.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 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49. 중앙일보 2012.01.07 "상해 임정 향하던 의친왕, 안동현서 잡혀 망명 실패"|https://www.joongang.co.kr/article/7082192
  50. 국사편찬위원회. “李堈公 신문조서(제2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5년 5월 17일에 확인함. 
  5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52. 이덕일 외. 《우리역사의 수수께끼3권》. 김영사. 
  53. 서중석 지음 (2006).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327쪽. 
  54. 한국사데에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 > 1919년(기미년)  11월  14일 《금요일》 아침에 안개 끼고 비가 조금 내림. 그 뒤 갬.
  55.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6년 08월 29일 "義王府漁基"
  56. 거제신문 2024년 07월 15일 "[옛날 신문으로 보는 거제 이야기 5] 의왕부 어업 기지 허가 계약"
  57.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20년 02월 22일 "李堈公殿下 소유 어장문제, 개방케 해 달라는 어민 3천여 명은 이강공저와 총독부에 청원, 암만 그리하더라도 문제는 안된다."
  5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 > 일제의 식민통치 > IV 일제 식민정책의 분석(3) -사회·경제- > 3. 수산업정책 > 3) 일본자본의 침투와 한국인의 저항.
  59. 디지털정읍문화대전 >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60.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일보 1930년 06월 17일 "李堈公殿下軍司令部附をも免ぜられた"
  6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30년 06월 14일 "이강공전하 어은거칙허"
  62.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경성일보 1930년 06월 03일 "李堈公殿下フオード工塲へ御微行"
  63.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조선신문 1930년 08월19일 "李堈公殿下今朝御歸城"
  64.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1년 12월 27일 "李鍝公殿下 三十日御歸省 오시는길에 별부들리시어 李堈殿下問候"
  65.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경성일보 1933년 5월 1일 "李堈公殿下明一日御入城"
  66.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3년05월03일 "李堈殿下 三年만에 御歸城 朝鮮호텔에 御投宿"
  67.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경성일보 1933년05월02일 "李堈公殿下昨夕御歸城遊ばす"
  68.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일보 1933년 9월 3일 "李堈殿下, 五日御歸城"
  69.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33년 09월 05일 "이강전하 백천온천 어행"
  70.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신문 1934년 05월 06일 "李堈殿下今夜東上"
  71.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경성일보 1934년 6월 15일 "李堈殿下十七日御歸城"
  72.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4년 06월 18일 "李堈殿下 釜山에 御上陸"
  73.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신문 1935년05월31일 "李堈殿下三日御歸城"
  74.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부산일보 1936년 07월 29일 "이강[李堈] 전하 조선으로 돌아와"
  7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부산일보 1940년 04월 03일 "〈동경전화〉 이강[李堈]공 전하 ; 7년만에 경성을 출발하여 동경으로 오다"
  76. 성북문화원 > 문화유산 > 성북동 별저
  77. “구한舊韓 의친왕 이박사에 메시지, 일 평민으로 건국에 공헌하겠다고”. 《자유신문》. 1945년 10월 28일. 
  78. “의친왕 김주석 방문”. 《자유신보》. 1945년 12월 6일. 
  79. 우사연구회 엮음, 심지연 지음, (2000).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 한울. 29쪽. 
  80.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 1945.12.06 기사 "이강공 임시 정부 내방"
  81.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독립신문 > 1946년 10월 4일 "啓蒙과 民生을 主劑 愛國協會新發足"
  82.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한성일보 > 1946년 10월 20일 " 愛國協會를 結成 ; 李堈(舊義親王)會長을 推戴"
  83. “사기에 걸린 이강공”. 《한성일보》. 1947년 4월 2일. 
  84.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일보 1948.09.14 "義親王宮은 어대로, 謀利輩의 私有?國有?, 無慘!建築地로 伐採된 王宮古木"
  8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6년(조선 개국 505년, 고종 33년, 병신년) 2월 5일 《수요일》 포근하고 맑음. "사촌은 의화군에게 첩을 돌려보내라고 진언 했는데 그 첩은 의화군이 가기 몇 달 전 사촌의 아내와 함께 먼저 일본에 가 있었다."
  8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로춍서 >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년, 광무 9년, 을사년) 10월 16일 수요일
  87.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88.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558페이지
  89.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의친왕묘
  90. 박종인 (2025년 5월 12일). “의친왕을 띄우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공적을 가로채다니! [박종인 기자의 '흔적']”. 조선일보. 
  91.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 ~ 20쪽
  92. 연안김씨 대동보 3권(延安金氏大同譜 三卷) 671쪽
  93. 순종실록부록7권, 순종 9년 11월 6일 양력 3번째 기사, "兩宮特賜金一百五十圓于前郡守金聖基 【李堈公妃之兄】 喪。"
  9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인물자료 > 김갑기(金甲基)
  95.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金春基 신문조서(제2회) "修和堂은 전부터 東京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96. 디지털 장서각 - 王家忌辰 및(王家忌辰 및), "李鍵公邸 尊號 鄭氏 陽曆忌辰日 明治四十五年一月十一日"
  97.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제6권 > 隆熙 3년 己酉(1909년) ④ > 10. 皇孫 誕生
  9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61.08.11 "망각의 옛 황족 이왕가"
  99. 한국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대동단사건) Ⅰ > 金興仁 訊問調書(第1回)(김흥인 신문조서 제1회) "氏名ハ金興仁. 年齡ハ36歲. 身分ハ常民.(성명은 김흥인. 연령은 36세. 신분은 상민.)", "戶主金永旭妹. 出生地ハ京城府東大門外.(호주 김영욱의 동생. 출생지는 경성부 동대문 밖.)", "自分カ11歲ノ時女官トシテ義和宮ニ入リ殿下ニ御附キ申シ, 關係ノ出來タノハ10年前カラデアリマス.(나는 11세 때 여관女官으로 의화궁義和宮에 들어가 전하를 모셨고, 관계가 된 것은 10년 전부터이다.)". 디지털 장서각 > 양공가공족보자료(兩公家公族譜資料) 162/258 "金興仁 明治十七年 八月五日生(陰曆 五月十四日) 父 金一善 母 李氏 身分 平民"
  10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金貞完 신문조서, "아버지는 김성환(金聖煥)이고 어머니는 주세창(朱世昌)이다. 신분은 상민이고 11세에 덕수궁 지밀나인으로 입궁했다. 1914년에는 이미 의친왕의 측실이었다."
  101. 장서각 기록유산DB - 1916년 7월 7일《가현록(加現錄)》 "朴英喜 開國五百年 十月五日生, 父 薪炭商 朴永祿 開國四百六十四年 四月十八日生, 母 姜氏 開國四百六十七年 七月十二日生"
  102. 문화일보 > 수정 2012년 4월 13일  <오랜만입니다>“皇孫 12남9녀 대부분 비참한 삶… 난 ‘상징적 황실’ 의무감으로 살아” |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109085?sid=103
  103. 천지일보 2021.06.18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김응집을 알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1)
  10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국내보도기사 > 1920년대 > 262. 梁大鉉 鄭永源 2명 가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모집, 李堈公 애첩 이연연을 협박하고 50원을 강탈(『동아일보』, 1921. 3. 8)
  10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공립신보 1908년 09월 02일
  106.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107. 1918년 조선미인보감
  108.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년 9월 5일
  109.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 황실계보 > 의친왕비
  110.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61.08.11 "망각의 옛 황족 이왕가"
  1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황손(皇孫)「2」황제의 후손
  112.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8년 03월 10일 "황손 이심세", 1908년 07월 17일 "王子慘景"

외부 링크

[편집]
제1대 사동궁 종주
1906년 ~ 1930년
후임
이건
전임
황윤명
제2대 성락원 장주[1][2]
1910년 ~ 1945년
후임
이건
전임
이재각
제2대 대한제국 적십자사 총재
1905년 6월 ~ 1910년 8월
후임
이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