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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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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in (토론 | 기여)님의 2010년 11월 1일 (월) 23:41 판 (豐臣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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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어식 한자 표기 (신자체)豊臣秀吉
일본어식 한자 표기 (구자체) 豐臣秀吉
가나 표기とよとみのひでよし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도요토미노 히데요시
통용식 표기토요토미노 히데요시
한국어 한자 발음풍신수길
로마자Toyotomi no Hideyoshi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상정보
시대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 덴분 6년 2월 6일(1537년 3월 17일)[1]
사망 게이초 3년 8월 18일(1598년 9월 18일)
개명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요시
별명 도키치로(통칭), 사루(猿, 원숭이), 모멘 도키치(木綿藤吉), 도요 다이코(豊太閤)
신호 풍국대명신(豊国大明神)
계명 国泰祐松院殿霊山俊龍大居士
주군 마쓰시타 유키쓰나오다 노부나가히데노부
관위 지쿠젠노카미, 종오위하 좌근위소장, 종사위하 참의, 종삼위 권대납언, 정이위 내대신, 종일위 관백, 태정대신, 추증 정일위
씨족 본성: 다이라 씨후지와라 씨도요토미 씨
명자: 기노시타 씨하시바 씨
부모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
어머니: 오만도코로
계부: 지쿠아미 양부: 고노에 마에히사
형제자매 닛슈(미요시 요시후사의 아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나가
아사히히메(사지 휴가노카미의 아내) → (소에다 요시나리의 아내)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내)
배우자 정실: 기타노만도코로[2]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
계실: 요도도노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외
자녀 하시바 이시마쓰마루
도요토미 쓰루마쓰
도요토미 히데요리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
묘소 교토 부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 도요쿠니 신사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히가시 구 후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3], 1537년 3월 17일[1] ~ 1598년 9월 18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겸 다이묘이다. 그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이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했다.[4]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국(尾張国) 아이치 군(愛知郡) 나카무라(中村)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기면서 오다 가문 안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죽자 주고쿠에서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돌아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 후, 오사카 성(大坂城)을 쌓았으며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었다. 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태합검지(太閤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라는 정책을 펴 국내를 안정시켰지만, 조선 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과오도 범했다. 임진왜란 중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죽여 후계를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주었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음을 맞이하였고, 히데요리의 보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필두로 한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위임하였다.

스노마타 성(墨俣城), 이시가키 산성(石垣山城)을 하룻밤에 완성했다는 이야기와, 가나가사키(金ヶ崎)에서의 퇴각에 있어 후위부대를 맡은 일, 다카마쓰 성 수공(高松城の水攻め) 등 그의 재능을 살린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고, 농민 출신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생애는〈센고쿠 제일의 출세가〉라는 정평이 나있다.

생애

출신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카무라(현 나고야 시 나카무라 구)의 농민 출신이라고 알려진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과 어머니 나카(なか)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년에 관해서는 덴분 5년(1536년)이라고 전해져 오지만, 최근 덴분 6년(1537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 야에몬의 성씨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출생일은 음력 1월 1일이며 아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하지만, 이는《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의 창작으로 실제 태어난 날은《천정기(天正記)》와 가신 이토 히데모리(伊藤秀盛)가 기재한 덴분 6년(1537년) 음력 2월 6일생으로 보고 있다.

널리 유포된 설로는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이 전사한 후, 어머니 나카는 지쿠아미(竹阿弥)와 재혼하였지만, 양아버지 지쿠아미와 히데요시의 관계는 험악하여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루가 국으로 향했다고 한다.《태합소성기(太閤素性記)》에 따르면 7세 때, 아버지 야에몬과 결별하고 8세에 고메이지(光明寺)에 가 불문에 입적하지만, 곧 뛰쳐나왔고, 15세에 망부의 유산 일부를 가지고 집을 나와 방랑했다고 한다. 그러나,《태합기(太閤記)》에서는 지쿠아미를 히데요시의 실제 아버지로 보고, 기노시타(木下)라는 성(姓)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이 아니라는 의혹과 아내 네네(ねね)의 어머니쪽 성이라는 투로 적고 있다. 히데요시의 출신에 관해서는 문학박사 겸 역사학자 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는 목수대장장이 등의 기술자 집단 출신설을 채택하였고, 역사학자 이시이 스스무(石井進)는 행상인 설 등 비농업종사자 설을 채택했다. 또, 일본가문연구회(日本家紋研究会)의 다카자와 히토시(高澤等)는 히데요시 일족이 사용한 택사문(沢瀉紋)과 히데요시의 통칭 도키치로(藤吉郎), 또, 누나 닛슈(日秀), 아사히(朝日)의 남편의 출신 및 미즈노 가문(水野氏) 설이 있는 계부 지쿠아미 등을 포함해 히데요시 자신도 미즈노 가문 출신이지 않느냐는 설을 역사독본(歴史読本)에 투고하였지만, 현 시점에서는 의혹 대부분이 불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마가와 가신

처음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로 이름을 올려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가문인 이노 가문이 지배하는 도토미 국 나가카미 군 즈다지 장원(현 하마마쓰 시 미나미 구 즈다지 정)의 즈다지 성(頭陀寺城) 성주 마쓰시다 유키쓰나(松下之綱)를 섬겨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도키치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곧 가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마쓰시다 유키쓰나는 이마가와 가문 몰락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덴쇼 11년(1583년) 히데요시에게 단바 국가와치 국의 1,600석을 받았다. 덴쇼 18년(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의 공으로 도토미 국 구노 성 1만6천석을 받는다.

오다 가신

이나바 산을 오르는 히데요시
쓰키오카 요시토시作《月百姿》중 7번째 이나바 산과 달

덴분 23년(1554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5]로써 일한다. 기요스 성의 성과 관련된 업무와 내방 업무 등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자주 발휘하고 솔선 수범하여 큰 성과를 보였다.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의 환심을 샀고, 점차 오다 가문내에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용모를 보고 노부나가가〈원숭이〉,〈대머리 쥐〉라고 부른 것 같다. 에이로쿠 4년(1561년) 아사노 나가카쓰(浅野長勝)의 양녀로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의 딸 네네와 결혼한다.

미노 국 사이토 다쓰오키(斎藤龍興)와의 전투 중 스노마타 성 축성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하지만,《무공야화》등을 근거로 한 이야기는 당시 사료에는 기술이 없고, 에도 시대에 창작되었다는 설이 강하다. 이 무렵 사이토 가문의 영향하의 미노로부터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重治),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正勝),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음력 9월 오미 미쓰쿠리 성(箕作城) 공략에 활약한 이야기가《신장기(信長記)》에 기록되어 있다(간논지 성 전투(観音寺城の戦い)).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제15대 쇼군에 옹립하고 교토를 평정하자,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았다. 당시 문헌에 히데요시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단, 히데요시란 이름의 적인 기록은 1560년 3월 8일짜 서장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겐키 원년(1570년) 에치젠 국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토벌에 종군하였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오미 북부의 맹우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배신으로 가나가사키에서 급히 퇴각하게 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는 이케다 가쓰마사(池田勝正)와 아케치 미쓰히데와 함께 후위부대를 맡아 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아자이·아사쿠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오다 정권 아래

덴쇼 원년(1573년)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그의 영지였던 오미 3개군을 하사 받아 오다니 성에 입성하지만, 산성인 탓에 비와 호 호변의 이마하마(今浜)에 성을 축조하고 지명을 나가하마(長浜)로 개명해 나가하마 성주로 부임했다. 이 무렵 오다 가문 내 유력 가신 니와 나가히데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로부터 한 자씩을 받아 성을 하시바(羽柴)로 개명하였다. 또, 오미의 인재를 발굴하여 옛 아자이 가문의 가신들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키워냈다.

덴쇼 4년(1576년) 에치고 국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대치중인 호쿠리쿠 방면군단장 시바타 가쓰이에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지만, 작전을 둘러싼 마찰로 무단으로 오미 나가하마로 귀환하였다. 그 후, 시바타 가쓰이에우에스기 겐신에 패배하였다(데토리 강 전투)(手取川の戦い)).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곧 용서하였고, 야마토 국에서 반기를 든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토벌명을 받아 히사히데를 토벌했다(시기 산성 전투(信貴山城の戦い)).

그 후, 오다 노부나가주고쿠 공략을 명 받아 하리마 국(播磨国)으로 진군했고, 하리마의 호족들은 히데요시 군에 굴복했다. 그들 중 고데라 가문의 가신 고데라 요시타카(小寺孝高; 후에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姫路城)을 양도하였고, 히데요시는 가신으로 맞이하였다. 일부 히데요시에 반기를 표한 세력은 제1차 고즈키 성 전투(上月城の戦い)에서 멸하였다.

덴쇼 7년(1579년) 고즈키 성을 둘러싸고 주고쿠의 모리 가문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비젠 국(備前国), 미마사카 국(美作国)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를 복속시켜 모리 가문에 우위에 섰지만, 셋쓰 국(摂津国)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모반으로 인해 주고쿠 공략은 일시중단되었다.

덴쇼 8년(1580년)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든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성주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를 공격하던 도중 다케나카 시게하루후루타 시게노리(古田重則) 등 유력 가신을 잃었지만, 2년에 걸친 포위공격에 적들은 기아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항복하였다(미키 전투(三木合戦)). 같은 해 다지마 국(但馬国) 야마나 아키히로(山名堯熙)가 농성하는 아리코 산성(有子山城을) 공략, 다지마 국을 오다 가문 세력하에 둔다.

덴쇼 9년(1581년) 이나바(因幡) 야마나 가문의 가신단이 야마나 도요쿠니(山名豊国)를 추방하고 모리 가문의 깃카와 쓰네이에(吉川経家)를 맞이하여 돗토리 성(鳥取城)에서 반기를 들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 주변의 병량을 매석해 돗토리 성을 병량고에 시달리게 하여 성을 함락한다(돗토리 성 전투(鳥取城の戦い)). 그 후에도 주고쿠 지방 일대를 세력하에 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이와야 성(岩屋城)을 공략해 아와지 국(淡路国)을 세력하에 두었다.

덴쇼 10년(1582년) 빗추(備中国)를 공략에 있어서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가 지키는 다카마쓰 성(高松城)을 수공으로 공략할 때, 모리 데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의 모리 가문의 대군이 맞이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혼노지의 변에서 기요스 회의

덴쇼 10년(1582년) 음력 6월 2일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살해된다(혼노지의 변). 이 때, 빗추 다카마쓰 성 공략에 힘쓰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알자, 곧 다카마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모리 데루모토와 강화를 맺고 교토로 회군한다(주고쿠 오가에시(中国大返し)).

히데요시의 출현에 당황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음력 6월 13일 야마자키(山崎)에서 히데요시와 전투를 버리지만,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와 니와 나가히데, 더욱이 미쓰히데 예하의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와 다카야마 우곤(高山右近)까지 히데요시 군에 가세하자, 아케치 미쓰히데는 이 전투에 패배하여 토착민의 손에 살해된다(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 그 후, 히데요시는 미쓰히데 잔당을 토벌해 교토를 장악했다.

음력 6월 27일,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분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기요스 성(清洲城)에서 회의가 열린다(기요스 회의(清洲会議)).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로 노부나가의 3남 간베 노부타카(神戸信孝;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천거했지만, 아케치 미쓰히데의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입김과 이케다 쓰네오키, 니와 나가히데의 지지도 있어 히데요시가 천거한 오다 노부나가의 적손 산보시(三法師;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로 결정되었다. 더욱히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간베 노부타카를 내세운 히데요시의 타협안에 시바타 가쓰이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노부나가의 영지분할에 있어서는 2남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가 오와리, 3남 오다 노부타카미노, 조카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가 이세 북부와 이가,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는 단고,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는 야마토, 다카야마 우곤나카가와 기요히데는 본령 안도, 니와 나가히데오미의 시가, 다카시마 15만석이 가증되었고, 이케다 쓰네오키셋쓰의 아마가자키(尼崎)와 오사카 15만 석이 가증, 호리 히데마사(堀秀政)는 오미 사와야마(佐和山)를 받았다. 시바타 가쓰이에도 히데요시의 영지인 오미 나가하마 12만 석을 받게 된다. 히데요시 자신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옛 영지인 단바, 야마시로, 가와치 28만 석이 가증되었다. 이로써 영지상으로는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인 가쓰이에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다.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대립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원인은 히데요시가 야마자키에 호지 성(宝寺城)을 축성하였고, 더욱이 야마자키와 단바에 검지를 단행해 사적으로 오다 가문의 여러 다이묘들과 교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덴쇼 10년(1582년) 음력 10월 가쓰이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와 오다 노부타카와 함께 히데요시에 대한 탄핵장을 여러 다이묘에 뿌렸다. 이에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15일 양자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 노부나가의 4남)를 상주로 해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려 위기를 빠져나갔다.

음력 12월 에치젠의 가쓰이에가 눈에 갇혀 움직이지 못한 것을 호기로 히데요시는 음력 12월 9일 이케다 쓰네오키 및 여러 다이묘를 규합하여 5만의 군을 이끌고 야마자키 호지 성을 출발해 11일 호리 히데마사사와야마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 시바타 가쓰토요(柴田勝豊)가 지키는 나가하마 성을 포위한다. 원래 가쓰토요는 가쓰이에와 같은 양자인 시바타 가쓰마사(柴田勝政)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조략에 응하여 항복하였다. 16일 미노로 출진해 이나바 잇테쓰(稲葉一鉄)를 항복시키고, 오다 노부카쓰의 원군에 힘입어 오다 노부타카의 가신 사이토 도시아키(斉藤利堯)가 지키는 가지키 성(加治木城)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하여 고립된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는 산보시를 히데요시에 넘겼고, 생모 사카 씨(坂氏)와 딸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는다.

덴쇼 11년(1583년) 음력 1월 반 히데요시 파 중 한 명인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히데요시 측의 이세 미네 성(伊勢峰城)과 세키 성(関城), 이세 가메야마 성(伊勢亀山城)을 공략한다. 이에 히데요시는 음력 2월 10일 이세 북부로 군을 파견하였다. 12일 가즈마스의 거성 구와나 성(桑名城)을 공략하지만, 견고한 수비앞에 12 km 뒤로 후퇴하였다. 또, 히데요시가 조직한 별동대를 나가시마 성(長島城)과 나카이 성(中井城)에 파견했지만, 이마저도 맹열한 저항앞에 무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세 가메야마 성은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와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야마우치 가쓰토요(山内一豊)의 공세앞에 음력 3월 3일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이세 전선에서는 점차 히데요시가 우위에 서게 된다.

음력 2월 28일 호쿠리쿠에서 시바타 가쓰이에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선봉으로 출진했고, 음력 3월 9일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자신이 이끄는 3만의 대군이 오미로 출발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이세 전선은 가모 우지사토에 맡기고 오미로 돌아와 11일 시바타 군과 대치하였다. 4월 13일 히데요시에 항복한 시바타 가쓰토요의 가신 야마지 마사쿠니(山路正国)가 가쓰이에 측으로 이탈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더해 오다 노부타카가 기후에서 다시 거병해 이나바 잇테쓰를 공격하는 등, 시바타 가쓰이에 측이 우위에 놓이게 된다.

20일 이른 아침, 가쓰이에의 중신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는 히데요시가 미노로 출병한 틈을 노려 오이와 산(大岩山)과 이와사키 산(岩崎山)의 성채를 공격해 함락하였다. 그 후에도 모리마사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명을 어긴채 함락한 성채에서 있었기 때문에 21일 신속히 회군한 히데요시의 반격을 받았고, 더욱이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신도 있어 시바타 가쓰이에는 대패해 군을 에치젠으로 철수시킨다(시즈가타케 전투).

24일 가쓰이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선봉으로 한 히데요시 군에 기타노쇼 성가 공격당하자, 정실 오이치노 가타(お市の方)와 함께 자결하였다. 그리고, 가가(加賀国)와 노토(能登国)를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주었고, 에치젠은 이 전투에서 협력한 니와 나가히데에게 주었다. 음력 5월 2일(날짜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음.), 미노를 공략해 오다 노부나가의 3남 오다 노부타카를 자결로 몰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반 히데요시 진영을 멸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

덴쇼 12년(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연하의 예를 하러 오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계기로 히데요시에 반발하며 대립하였다. 음력 3월 6일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히데요시와의 전쟁을 말리는 중신 아자이 나가토키(浅井長時),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쓰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를 모살해 사실상 히데요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때,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카쓰에 가담했으며, 이에 더해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기이(紀伊) 사카이 무리(雑賀党)도 반 히데요시를 기치로 결기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세키 모리노부(関盛信),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오다 노부카네 등 이세의 여러 장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거취가 불분명한 미노의 이케다 쓰네오키를 오와리와 미카와를 주어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음력 3월 13일 쓰네오키는 이누야마 성(犬山城)을 지키고 있던 오다 노부카쓰의 가신 나카야마 가쓰타다(中山雄忠)를 공략했으며, 이세에 있어서도 미네 성을 함락하는 등, 공세를 펴갔다.

그러나, 이에야스, 노부카쓰 연합군도 곧 반격하여 하구로(羽黒)에 포진한 모리 나가요시(森長可)를 격파했다(하구로 전투(羽黒の戦い)). 그런 후, 고마키(小牧)에서 진을 펴, 히데요시와 대치했다. 히데요시는 사이카 무리에 묶겨 오사카로부터 움직이지 않았지만, 21일 오사카를 출발해 27일 이누야마 성에 입성했다. 히데요시 군도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양 군은 장기대치 계속하여 전선은 교착되었다. 이 때, 하시바 군 10만,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3만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앞선 전투에 패해 설욕을 다짐하는 모리 나가요시이케다 쓰네오키가 히데요시의 조카 미요시 히데쓰구(三好秀次; 후에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옹립해 음력 4월 6일 미카와 기습을 단행한다. 그러나, 음력 4월 9일 이를 간파한 도쿠가와 군의 역습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케다 쓰네오키, 모토스케(元助) 부자와 모리 나가요시 등은 전사했다(나가쿠테 전투(長久手の戦い)).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교착되어 갔다. 이에 히데요시는 가가노이 시게모치(加賀井重望)가 지키고 있는 가가노이 성(加賀井城) 등, 노부카쓰 측 이가, 이세를 공략해 갔다. 음력 11월 11일 오다 노부카쓰는 사실상 히데요시에 굴복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상의 없이 무단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대의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미카와로부터 철퇴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후의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전후, 히데요시는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관되었다. 사실 이 두 다이묘의 전쟁은 전투 자체만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압승이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멸망을 눈앞에 둔 상황이였으나 오다 노부카쓰의 배신으로 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의 명분에서 밀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덴쇼 14년(1586년) 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副田吉成)에게 시집을 가서 유부녀가 된 여동생 아사히(朝日)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에 시집 보냈으며, 더욱이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를 인질로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의 입경을 제촉하였다. 이에야스도 이에 승복해 상경하였고,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했다.

도요토미 정권

도요토미 가문의 천수
오사카 여름의진도 병풍〉

덴쇼 11년(1583년)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 성을 축조한다. 분고 국(豊後国)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그 화려함에 놀라〈삼국무쌍의 성이다.〉라고 칭했다. 그러나 성의 일부분에 방어상 문제가 있어 히데요시 자신도 그 점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가 방어가 취약한 남쪽에 사나다마루(真田丸)라고 불리는 성채를 쌓아 방어를 강화해 도쿠가와 측을 괴롭혔다.).

덴쇼 12년(1584년) 조정에서 쇼군 임관을 권했지만, 이를 거부했다는 설이 있다.

덴쇼 13년(1585년) 음력 3월 10일 히데요시는 정2위 내대신(内大臣)에 위계 임관되었다. 그리고, 21일 기이 공략에 나서 사이카 무리와 전투를 벌인다. 최종적으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에 명하여 사이카 무리의 수령 스즈키 시게오키(鈴木重意)를 모살하여 기슈(紀州)를 평정하였다(기슈 정벌).

또, 시코쿠(四国)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해서는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를 총대장에 임명해 출진 시겼다. 이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의 모리 군도 가세하여 음력 7월 25일 시코쿠를 평정했다. 모토치카에게는 도사 국(土佐国)만 그에게 주었다(시코쿠 정벌).

음력 7월 11일 예전부터 관백직을 둘러싼 내분이 다시금 불거지자, 히데요시는 고노에 마에히사(近衛前久)의 조카가 되어 관백직에 올랐고, 덴쇼 14년(1586년) 음력 9월 9일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음력 12월 25일 태정대신에 올라 정권을 확립했다(도요토미 정권). 이에 더해, 히데요시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가 되어 도요토미 막부를 열려고 했지만, 요시아키가 거절해 관백직에 올랐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후세의 창작이다.

엣추 국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에 대해서는 음력 8월 직접 군을 이끌고 도야마로 진군했지만, 거의 전투없이 음력 8월 25일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 항복하였다. 오다 노부카쓰의 조력도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고 엣추 국 니카와 군(新川郡)을 주었다. 이리하여 기이, 시코쿠, 엣추를 세력하에 두었다.

규슈 평정

규슈(九州)에 있어서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세를 떨치고 있었고, 시마즈 가문에 압박에 오토모 소린은 히데요시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지만, 요시히사를 이를 거부하여 규슈에 군을 보낸다.

덴쇼 14년(1586년) 분고 국 헤쓰기 강(戸次川; 현 오노 강(大野川))에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군감으로 해, 조소카베 모토치카, 노부치카(信親) 부자,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로 구성된 혼성군으로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이끄는 시마즈 군과 싸워보지만, 센고쿠 히데히사의 실책에 의해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전사했다.

덴쇼 15년(1587년) 히데요시 스스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한다. 이에 시마즈 군은 압도되어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다(규슈 정벌). 이렇게 하여 서일본 전역은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전후, 하카타(博多)에서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반포했지만, 사실상 기독교인은 묵인되었다. 덴쇼 16년(1588년) 가타나가리를 실시했다.

오다와라 평정

덴쇼 17년(1589년) 측실 요도 도노(淀殿)사이에서 쓰루마쓰(鶴松)가 태어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같은 해 고호조 가문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猪俣邦憲)가 사나다 가문의 가신 스즈키 시게노리(鈴木重則)가 지키고 있던 나구루미 성(名胡桃城)을 탈취한 일을 계기로 덴쇼 18년(1590년) 히데요시는 고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간토(関東)로 군을 돌려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했다.

《태합기》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무쓰, 데와의 여러 다이묘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동참할 것을 명하지만,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뒤늦게 동참한다. 히데요시는 오슈다테 마사무네를〈꿈틀데는 벌레〉로 평했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대기, 천위, 모든 사람에 미치지 않고 평했고, 격이 다름을 보였다. 다테 마사무네가 보기 좋게 귀향하자, 여러 무장들은 호랑이를 풀어주면 위험하다고 진언했지만, “반항하면 토벌하면 그만”이라고 말했고, 여러 무장들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오다와라 성은 우에스기 겐신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함락하지 못한 견성이였지만, 계절적 이유로 철병해야하는 여타 군과 달리 히데요시 군에 의해 오다와라 성은 3개월의 농성 후, 개성하였다.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는 할복을 명 받았고,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는 고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되었다(오다와라 정벌).

천하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결

최후의 적 고호조 가문을 굴복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마감시겼다.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이 군사력으로 제압하지 않은 다이묘가 많이 있었고, 이들 다이묘의 군사력은 온전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유력 다이묘의 처우문제가 도요토미 정권의 과제였다.

덴쇼 19년(1591년) 후계자로 지명했던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태합(太閤)으로 불렸다. 또, 다도인 센 리큐(千利休)에 할복을 명했다. 이에 센 리큐의 제자 후루타 오리베(古田重然),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의 탄원도 있었지만, 무위에 그쳤고, 센 리큐의 목은 이치조모도리 다리(一条戻橋)에 효수되었다. 센 리큐가 할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이 해, 도호쿠 지방의 난부(南部) 가문 일족, 구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후계 다툼을 계기로 난을 일으킨다. 히데요시는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가모 우지사토,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로 구성된 군을 도호쿠에 파견하였다.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도 이에 동참하여 군은 6만으로 늘어났다. 구노헤 마사자네, 사네치카(実親) 형제는 항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항복하였다. 그 후, 구노헤 가문은 모두 참수되었고, 멸문되어 난은 종결되었다.

임진·정유왜란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라고도 하는 임진·정유왜란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일본이 의 정복과 조선의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으로 한반도 남부에 침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으로 인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분로쿠 2년(1593년)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된다.

임진왜란의 의의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은 조선삼포 왜란등의 난리를 일으켜 말썽을 부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책임추궁은 커녕 쳐들어온 왜구만 퇴치할 뿐 일본에 오히려 콩과 쌀을 주기적으로 원조해주는가 하면 일본의 의견을 들어주기 위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 등 조선 영토 내부의 특정 지역에 일본인들이 상주하면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일본에 대해 굉장히 관대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렇게 조선이 일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줌에도 불구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조선에 대규모 전쟁을 걸었으며 이로 인하여 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일본에 잡혀갔으며 경복궁 등 조선의 주요 건물들이 폐허가 되는가 하면 조선 전지역이 황폐화 되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의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6][7]

  1. 유력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공명심과 영웅 심리에서 기인했다는 설.
  2. 뒤늦게 얻은 아들 쓰루마쓰가 죽은 비통함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3. 해외무역 장악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4.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 계획에 영향을 받아, 통일 이후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설.
  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야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는 설. 그래서 강화조건에 명나라 후비를 일본에 바치라는 것과 조선 8도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1, 4, 5의 이유가 혼합되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임진왜란에 반대한 다이묘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조선으로 군사를 내는 것에 반대 하였으나,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진을 강행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풍토병과 황무지 개간 및 지배 지역의 치안 문제 등, 갖은 변명을 둘러대며 기어이 불참하였고, 자신의 군대를 온전히 보존시켰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만은 임진왜란의 출전을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였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의 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찌기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종교간의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리스도교,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성격적 문제(고니시 유키나가는 온건파, 가토 기요마사는 급진파)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앙숙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둘을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 이유인 즉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게 하여 최대한 빨리 조선을 점령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한편, 분로쿠 2년(1593년) 측실 요도 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쓰구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심각한 상황에 빠진다. 2년 후인 분로쿠 4년(1595년) 관백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악정과 난행을 이유로 폐적시키고, 고야 산으로 추방했다. 후에 모반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할복시킨다. 이 사건으로 인해 히데쓰구의 보좌역인 마에노 나가야스 등 유력 가신이 연좌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또, 히데쓰구 일가도 처형되었다. 히데쓰구의 난행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아들 히데요리의 방해꾼이 될 가능이 있는 히데쓰구를 처분했다는 견해와 이 일로 인해 도요토미 다이묘의 결속이 저해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정유재란

분로쿠 5년(1596년)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어, 게이초 2년(1597년) 14만의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칠천량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한다. 이 후,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8도 중에 남부의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과 혼례시킬 것 등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강화가 결렬되었다. 문제는 중간에서 외교를 담당하던 심유경(沈惟敬)이 명나라에 거짓으로 보고를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분노가 극대화되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죽음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임종하였다. 사인은 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1세 또는 62세였다.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벼역의 사기 문제 때문에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서 조선에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였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참수형에 처해짐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종료와 그 결과

이 후, 조선의 일본군은 철군하였고,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을 통해 도공을 납치 및 활자를 포함 많은 문화재의 약탈로 도자 문화나 인쇄기술의 발전을 꾀한 반면, 전쟁기간 동안에 일어난 문치파와 무단파간의 갈등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로 도요토미 정권은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정권의 에도 시대가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에도시대가 도래한 것과 병자호란이 겹쳐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급격하게 호전되기도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화 되어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했고 이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 광해군 집권기에는 명과 후금 중에 조선에 유리한 외교정책을 펴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율했으나, 의 은혜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명분하에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인조반정 때문에 외교를 조율할 광해군이 없어진 조선은 후금과의 갈등이 극대화되었고, 때마침 명나라마저 멸망하여 곧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명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후금이 대두되어 왕조가 교체되었다. 한편 일본에 에도시대가 도래한 것과 이로 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거기에 병자호란까지 겹쳐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급격하게 호전되기도 했다.

인물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정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리더라는 견해가 있다.[8]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응집시키는 데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그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했고, 이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9] 하지만 내정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타나가리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와 노동력의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이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정책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선조실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과 그가 정권을 장악한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래 그는 출신이 매우 비천하여 꼴을 베어 파는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오다 노부나가가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히데요시가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에게 변소지기를 일을 시켰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노부나가는 이에 자신의 신을 만들게 하였는데 역시 정성을 다해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노부나가가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출세의 길이 열렸다.

이후 일본에 큰 도둑이 있어 노부나가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그가 토벌을 자청하였다. 이때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노부나가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노부나가가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는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노부나가를 시해한 자[10]를 죽이고 스스로 후계자가 되어 간바쿠(틀:Ja-y)가 되었다.

 
—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3일(임인) 1번째 기사[11]

도요토미 시대는 일본 로마 가톨릭 교회를 묵인한 시대이기도 했다. 에스파냐로마 가톨릭 교회 선교사들은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중남미아시아에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였다. 예수회 설립자중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일본은 선교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다이묘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이를 묵인[12]했고, 도요토미도 서양의 문물 전래 통로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그의 묵인 정책은 서구 열강을 견제하기 위한 강경 정책으로 바뀌어 26명의 순교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종교를 앞세운 서양의 식민정책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13] 기리시탄에 대한 도요토미의 박해정책은 도쿠가와 정권, 즉 에도 막부 시대에도 이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기한 배우들

함께 읽기

바깥 링크

주석

  1. 덴분 5년 음력 1월 1일(1536년 2월 2일)라고도 한다.
  2. 섭정, 관백의 정처를 가리키는 말로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를 지칭하는 말로 많이 사용된다.
  3. 원칙적으로 이름은 도요토미노 히데요시(とよとみ の ひでよし)로 읽어야 한다.
  4. 酒木隆義(사카키 다카요시), 酒木寿美子(사카키 스미코). 《易しい京の歴史(알기 쉬운 서울의 역사)》. 文芸社(분게샤). 277쪽. ISBN 978-4835521251. 
  5. 사적으로 고용되어 주인의 집에 더부살이로 살면서 잡다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주로 평민출신이다.
  6. 아행지적 블러그
  7.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
  8. 그 등장과정이 극적이었던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매우 독특한 개성과 지도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파격성과 역동성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형식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복잡한 의사결정과정을 단순화시켜 신속하고 정확하게 결정하고 기민하게 행동했다. 이와 같은 파격성과 역동성 그리고 신속성 등을 바탕으로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와의 패권경쟁에서 승리하고 일본을 통일해 갔다.

    그렇지만 단일화된 정치권력의 형성 이후, 히데요시는 리더십에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보여준 파격성, 역동성 그리고 신속성은 전시(戰時)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서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이지만, 평화적인 상황이나 중장기적인 국가체제의 정립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리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이 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단일화된 중앙권력을 구축할 줄은 알았으나, 단일권력을 바탕으로 국가체제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 단일화된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연과 전시 그리고 조형물을 통해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다.

     
    송치웅. “일본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리더십과 국가발전”. Daily정경News. , <송치웅의 정책제언>
  9. 이는 #원인1과 일맥상통한다.
  10. 아케치 미쓰히데
  11. 원문에는 인명이 한국어 한자음(풍신수길, 직전신장)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일본어 발음으로 바꾸었다.
  12. 김성환. 《《교실밖의 세계사》》. 사계절. 기독교의 전래당시 일본사람들은 불교의 한 종파가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13. 자와할랄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일본인들이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몰라서 묵인했지만, 서구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는 박해로 돌아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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