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탁 (정간공)
정탁(鄭琢, 1526년 ~ 1605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정, 호는 약포, 본관은 청주이다.
개요
이황의 제자로 명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선조 때 교리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로 모시었으며 명나라 송응창을 영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몸소 전쟁터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가 연로함을 이유로 만류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를 거쳐 3등 호종 공신으로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서는 물론 천문·지리·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저서로 《악포집》, 《용만견문록》 등이 있다.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본적은 서원(西原)이니 고려시대에 대장군인 정의(鄭顗)가 절개(節介)로 필현보(畢玄甫)의 난에서 죽었다. 그 뒤에 계신 분이 정오(鄭䫨)이고, 사도(司徒)요 서원백(西原伯)인데 돌아가시어 장사를 안동(安東)에서 지내니 드디어 영남 사람이 되었으며 여러 대가 불진(不振)하였다. 증조는 정원로(鄭元老)인데 장수현감이요, 할아버지는 정교(鄭僑)인데 생원(生員)이요,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인데 모두 숨은 덕으로 빛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뒤에 공의 귀(貴)로 증조는 이조판서를 증직(贈職)하고, 할아버지는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아버지는 순충보조공신 의정부영의정 청성부원군(純忠輔祚功臣議政府領議政淸城府院君)에 증직하고 봉군(封君)하였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증직하니 한씨(韓氏)요 진사인 한종걸(韓終傑)의 따님이다. 부인은 거제반씨(巨濟潘氏)로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정윤저(鄭允著)인데 집의(執義)를 증직하고, 다음은 정윤위(鄭允偉)인데 주부(主簿)를 증직하였으며, 다음은 정윤목(鄭允穆)인데 찰방이다.
이 가운데 정윤목(1629~1671)은 매우 총명하며 경서와 역사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뛰어난 문장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탄복했다. 학문이 예절•음악•병법•형법•음양•달력,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글씨•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는 당시 제1인자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세자 광해군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할 때 세자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 삼강리의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1589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 그곳 수양사(首陽祠)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큰 글씨를 베껴 써와 현판에 게시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도정서원(道正書院) 학파 : 퇴계 학파
정탁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표상이 있고 천품의 자질이 도덕에 가까웠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시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 방법을 들었고 참되게 알고 실천하는 데 공효로 하였다. 정탁이 가정에 있으나 조정에 있을 때나 승법(繩法)과 약례(約禮)에 한결같이 따르고 관후(寬厚)와 인서(仁恕)로 덕을 삼고 사람을 사랑하며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일을 논함에 대체(大體)를 인용하고 명분을 중하게 여겼으며 계획을 세워 아뢴 것이 다 원대한 규모와 획책이다. 의논을 무겁게 여기고 사무에 벽지(辟至)하며 측달(惻怛)하며 자상(慈詳)하여 반드시 가급적 살리는 길을 구하고 사람들이 죄와 허물에 빠진 자도 비록 소원하고 취향이 달라도 오직 약포공(藥圃公)이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하였다.
정탁께서 『중용』과 『대학』을 즐거이 읽으셨고 오로지 묵송하기를 불철하였으며 천문과 지리와 상수와 병가에 이르기까지 넓게 달통하였다. 유총병(劉摠兵)인 정(綎)의 막중(幕中)에 호상공(胡相公)인 환(煥)이라 하는 자가 있으니 유총병(劉總兵)의 스승의 처지라 정탁이 서신을 주어 왜의 실정과 왜적 방어에 대책을 논함에 아래위로 치달은 수천의 말씀과 저들과 우리들의 장단점과 강약과 이해와 승패의 형태를 요연(瞭然)하게 손바닥을 보는 것같이 하였다.
그의 재조가 완전하고 용사(用事)에 주밀(周密)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정탁이 처음에 유술(儒術)로 진출하여 중간에 화란을 겪고 말 굴레와 궁창에 피곤(疲困)하였고, 늦게는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또 퇴직을 고했으니 비록 크게 포부를 펴서 중흥의 열정을 좌우하는 데는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너그럽고 어질고 넓게 사랑하고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너그러이 옛 대신의 풍화가 있었도다. 『서전(書傳)』에 이르되, 한 개절(介節)한 신하가 있음이여 끊고 베듯한 딴 기술은 없으나 그 마음이 아름다워 관용이 있는 것 같아 남의 기술이 있음을 자기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능히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호한다고 하였으니 정탁과 가까웠다
『약포선생문집(藥圃先生文集)』은 본집 7권 4책, 속집 4권 2책으로으로 합 11권 6책이다.
『침간정문고(枕簡亭文庫)』 소장본은 본집(本集)이다. 본집은 왕명에 따라 1760년(영조 36) 5대손 정옥(鄭玉)이 중심이 되어 간행하였다. 시는 「용만록(龍灣錄)」이라고 하여 주로 임진왜란 당시 의주를 배경으로 하여 지은 것이 대부분으로 「상송경약막부(上宋經略幕府)」, 「상이제독행유(상李提督行惟)」, 「배민(排憫)」등이 그 대표작이다.
서(書)에는 이황, 조사경(趙士敬) 등과 주고받은 것이 있으며, 중국의 선비 호환(胡煥)과 주고받은 것도 있다. 소(疏)는 대부분 사직을 상소하여 올린 것이나 「척화소(斥和疏)」는 일본과 화의를 맺는 것을 반대하여 지은 것이다. 차(箚), 계(啓), 헌의(獻議)는 대개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제반 문제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로 이순신, 김덕령의 옥사 등과 관련된 내용이다.
서(序)에는 예천군 고평동에 동계(洞契)를 실시하게 된 연력을 밝힌 「고평동계경정약문(高坪洞契更定約文)」등이 있다. 잡저의 『피난행록(避難行錄)』은 1592년(선조 25) 4월 30일부터 1593년 1월 28일까지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란을 가 있던 시기에 있은 일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은 전쟁이 끝난 뒤 왕명에 따라 명나라에 군 관계자를 전별하고 보고한 내용으로 병부우시량 송응창(宋應昌), 중군도독부도독(中軍都督府都督) 이여송(李如松) 등 명장수의 관직•이름•거주지 등 인적 사항과 사적인 대화, 나아가 주고받은 문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당시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속집은 1818년(순조 18) 후손 정광익(鄭光翊), 정필규(鄭必奎), 정창운(鄭昌運) 등이 편집한 것을 1821년 간행하였다. 시는 한거(閑居)하면서 느낀 감회나 학문하는 생활을 읊은 것이다. 서에는 이황, 조사경 등과 주고받은 것이 있으며, 중국의 선비 호환(胡煥)과 주고받은 것도 있다. 차(箚)•계(契)는 대부분 사직하는 내용이다.
伸救箚右議政鄭琢
伏以。李舜臣身犯大罪。律名甚嚴。而聖明不卽加誅。元招之後。復許窮推。非但按獄體段爲然。抑豈非聖上體仁一念。期於究得其實。冀有以或示可生之道歟。我聖上好生之德。亦及於有罪必死之地。臣不勝感激之至。第念。臣嘗承乏命官。推鞫按囚。固非一再。凡罪人一次經訊。或多傷斃。其間雖或有可
論之情。而徑自殞命。已無所及。臣嘗竊憫焉。今舜臣。旣經一次刑訊。若又加刑。則嚴鞫之下。難保其必生。恐或傷聖上好生之本意也。當壬辰倭艘蔽海。賊勢滔天之日。守土之臣。棄城者多。專閫之將。全師者少。朝廷命令。幾乎不及於四方。辭臣倡率舟師。乃與元均。頓挫兇鋒。國內人心。稍有生意。倡義者增氣。附賊者回心。厥功鉅萬。朝廷嘉甚。至加崇秩。賜以統制之號。非不宜也。舜臣爲大將。見可而進。不失時機。能擧舟師。大振聲勢。則臨難不避之勇。元均固有之。而畢竟摧陷之功。舜臣亦不讓於元均矣。舜臣諳
鍊備禦。手下才勇。咸樂爲用。未嘗喪師。威聲如舊。倭奴之最怕舟師者。未或不在於此。其有功於鎭壓邊陲如此。或者以爲舜臣一度建功之後。更無可紀之勞。以此少之。臣則竊以爲不然。四五年來。天將主和。皇朝東封之事又起。我國大小將士。不許措手於其間。舜臣不復宣力者。非其罪也。近日倭奴之再擧入寇也。舜臣之不及周旋者。其間情勢。亦或有可論。蓋凡當今邊將之一番動作。必待朝廷之成命。無復有專閫之事。倭奴未過海之前。朝廷秘密下敎。登時傳致與否。未可知也。海上風勢之順逆。舵運
之便否。亦未可知。而舟師分番不得已之事。昭載於都體察使自劾狀啓中。則舟師之臨急不得致力者。事勢亦然。似不可以此全責於舜臣也。往日馳啓中。其所陳之辭。涉於虛妄。極可怪駭。而此說如或得於下輩之誇張。則恐亦容有中間不察之理。不然。舜臣亦非病風之人。敢爲如是。臣竊未解。若夫亂初軍功馳啓之中。不爲一一從實。貪人之功。以爲己功。委涉誣妄。以此而問罪。則舜臣亦何辭焉。然而若非全德之人。則於物我相形之際。能無欲上人之心者蓋寡。因循苟且之間。鮮不做錯。特上之人。察其所
犯之大小。而有所輕重之耳。夫將臣者。軍民之司命。國家安危之所係。其重如此。故古之帝王。委任閫寄。別示恩信。非有大罪。則曲護而安全之。以盡其用。厥意有在。大扺人才。國家之利器。雖至於譯官算士之類。苟有才藝。則皆當愛惜。況如將臣之有才者。最關於敵愾禦侮之用。其可一任用法。而不爲之饒貸也。舜臣實有將才。才兼水陸。無或不可。如此之人。未易多得。邊民之所屬望。敵人之所嚴憚。若以律名之甚嚴。而不暇容貸。不問功罪之相準。不念功能之有無。不爲徐究其情勢。而終致大譴。則有功者無以自勸。
有能者無以自勵。雖至挾憾如元均者。恐亦不能自安。中外人心。一幷解體。此實憂虞之象。而徒爲敵人之幸。一舜臣之死。固不足惜。於國家所關非輕。豈不重可爲之慮乎。古者。不替將臣。終收大功。如秦穆之於孟明者。固非一二。臣不暇遠引。只以聖上近日之事啓之。朴名賢亦一時之猛將。嘗觸邦憲。朝廷特原其罪。未幾有湖右之變。變過己丑。而名賢一擧戡定。功在宗祊。其棄瑕責效之意至矣。今舜臣罪陷大辟。幾犯十惡。律名甚嚴。誠如聖敎。舜臣亦知公論之至嚴。常刑之可畏。無望自全。乞以恩命特
減訊次。使之立功自效。其感戴聖恩。如天池父母。殞首圖報之志。必不居名賢之下。而我聖朝中興圖閣之勳臣。安知不起於今日之胥靡哉。然則聖朝御將用才之道。議功議能之典。許人改過自新之路。一擧而俱得。其有補於聖朝撥亂之政。豈淺淺哉。臣謹因禁府收議。嘗陳固陋。非但不合羣議辭亦不能達意。而愚臣一得。冀或聖擇。玆敢不辭煩瀆。更申前說。以備芻蕘。恭俟聖諭。如或臣之瞽言。少裨國事之千。一。則臣萬死猶幸。臣苦患感冒。已經二旬。尙此彌留。未得躬詣闕下。謹具箚以進。輕冒
宸嚴。彌增隕越之至。取進止。
可悲也。公卒後百十四年辛卯。李畬書。
(李忠武公全書卷之十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