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레키리시탄
가쿠레키리시탄(일본어: 隠れキリシタン)은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밀교 형식으로 신앙을 유지해온 일본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말한다. 1612년에 에도 막부가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불법화하면서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서 신앙을 유지했고, 그 과정에서 원래의 가톨릭의 교리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전해지게 되었다.
역사
일본에 처음 로마 가톨릭이 전파된 때는 1549년이었다.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도달했던 나바라 왕국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선교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때 조총과 같은 유럽제 제품들이 일본에 대거 유입되면서 예수회 수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로, 16세기 일본에서는 가톨릭에 귀의한 일본인들이 많이 늘어났고, 이들을 기리시탄(영어: リシタン)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590년에 일본 전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이 예수회와 결탁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것을 우려해 다이묘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접촉을 막았고, 기리시탄들의 종교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바오로 미키와 같은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 뒤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차지하자, 임진왜란의 실패로 위상이 뿌리부터 흔들리던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불교나 신토와 마찰을 빚는다는 구실로 로마 가톨릭의 포교를 금지하고 기리시탄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많은 수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하고 쇼군직을 세습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남은 기리시탄마저 색출하고자 1629년부터 후미에를 실시하자, 또다시 많은 수의 기리시탄들이 사망하였다. 1639년에는 비(非) 기독교 신자이던 다이묘인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폭정에 분노한 기리시탄들이 반란을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하자, 막부군이 이를 토벌하고는 남은 기리시탄들을 색출해 학살하면서 남은 이들이 밀교의 형식으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이어가게 되었다. 비록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폭정을 이유로 막부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고 처형되었지만,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많은 수의 기리시탄들이 불교 관련 물건으로 위장한 기독교 관련 물품을 들고다니면서 구전으로 신앙을 이어가게 되고, 결국 원래의 가톨릭의 교리나 전례와는 상이한 형태로 신앙이 변질되었다. 그러던 중인 1853년에 발생한 구로후네 사건과 1868년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과의 접촉이 다시금 늘어나면서 숨어있던 기리시탄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면서 전세계에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20세기 초반까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이 있었다.